장충단(奬忠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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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때 을미사변으로 순사(殉死)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지내던 곳.

개설

1900년(광무 8) 5월 31일 고종이 내린 조칙을 받들어 1894년(고종 31) 동학군에게 희생당한 병졸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 때 궁궐을 지키다 죽임을 당한 장졸 및 궁인 등 나라를 위한 일에서 죽은 자들을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 원수부(元帥府)에서 장례원(掌禮院)에 지시하여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세운 곳이었다.

위치 및 용도

장충단은 조선시대 어영청(御營廳)의 분영인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남산의 동쪽 기슭에 있었으며,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일대이다. 고종의 명으로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訓鍊隊) 연대장(聯隊長)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宮內府) 대신(大臣)이경직(李耕稙) 이하 여러 장병을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마련한 초혼단(招魂壇)이다.

장충단은 1900년(광무 4) 11월 10일(음력 9월 19일)에 낙성식과 동시에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였으며 이후 1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향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弔銃)을 쏘면서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장충단에서는 처음에는 군부대신으로 증직된 충의공(忠毅公) 부령(副領)홍계훈과 진남영(鎭南營)의 영관(領官)염도희(廉道希), 무남영(武南營)의 영관이경호(李璟鎬) 3인을 주신으로 배향하였다. 뒤이어 통위영(統衛營)의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 장위영(壯衛營)의 대관 이학승(李學承), 진남영의 대관 이종구(李鍾九) 3인을 추가로 배향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갑오년에 동학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1901년(광무 5)에는 을미사변 때 죽은 이경직과 춘생문 의거사건으로 희생된 이도철(李道徹)과 임최수(林㝡洙)도 추가로 배향하여 모두 9명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을 지냈다.

변천 및 현황

장충단에서는 광무 연간에는 제사가 치러진 것으로 여겨지지만, 언제부터 제향이 없어졌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1908년(융희 2) 7월 23일 국가에서 지내는 각종 제사제도에 대한 개정이 이루어져 다수의 제사가 폐지되었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들어서 제향이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융희 3)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자 일제는 국장을 선포하고 1909년 11월 4일 황족과 정부 관료들, 국민들을 모아 놓고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제를 장충단에서 거행하였다. 이후 장충단은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었고 공원화되었다.

1918년 4월 26일에는 경찰과 소방계원들이 운동회를 개최하였으며 1919년 6월부터는 이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광장, 연못, 어린이놀이터, 산책로, 공중변소, 교량 등 시설물을 만들고, 상해사변 때 결사대로 전사한 일본의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웠다. 광장에서는 운동회를 비롯하여 궁술대회, 가정부인운동대회 등 각종 체육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41년에는 대동아전쟁 황군필승국도대회도 개최하였다.

일제의 건물 파괴도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1929년에는 장충단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의 보리사인 박문사(博文祠)를 세우기 시작하여 1931년에 완공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이른바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진충보국의 위엄을 배우고 신도를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정신박람회 가설건물을 설치하고, 경성부에서는 궁도장을 준공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해방 이후 박문사와 동상 등 일제가 설치한 모든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졌으며, 6·25전쟁으로 장충단의 사전과 부속 건물은 파손되었으나 장충단비(奬忠壇碑)는 남아 있다. 현재 장충단공원은 면적이 약 546,000㎢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동상을 비롯하여 석호정(石虎亭)·장충단 비석 등이 있으며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는 수표교(水標橋)도 청계천 복개 이후 15년간 장충단공원의 초입에 있었다. 장충단공원은 남산공원에 흡수되어 전체가 자연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형태

장충단은 3층 기단 위에 15칸의 제단 1동과 전사청(典祀廳)을 비롯한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충단 건너편 동쪽 길목에 민영환(閔泳煥)이 비문을 짓고 순종이 친필로 ‘장충단(獎忠壇)’ 세 글자를 써서 비를 세우고, 1칸 규모의 비각도 마련하였다.

부속 건물로 17칸 반의 양위헌(楊威軒)과 10칸 규모의 장무당(壯武堂) 건물도 지었으며, 30칸 규모의 요리정(料理亭)은 회색으로 단장한 38칸 반의 목책을 둘렀다. 요리정 부근에는 화원과 화계를 꾸미고 돌을 이용한 가산을 만들었다.

장충단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돌로 만든 석교, 나무로 만든 대량판교(大梁板橋)와 중판교(中板橋)를 가설하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건널 수 있도록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장충단에는 동학군에게 희생당한 병졸과 함께 을미사변 때 명성왕후를 대신하여 순직한 홍계훈을 모시고 있다. 을미사변은 경복궁에 일본인 낭인들이 쳐들어가 고종을 위협하고 명성왕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이때 홍계훈은 일본 낭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직하였다.

참고문헌

  • 『장충단영건하기책(獎忠壇營建下記冊)』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대관』, 서울특별시, 1987.
  • 서울특별시,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 1981.
  • 이상배, 「고종의 장충단 설립과 역사적 의의」, 『도시역사문화』204, 서울역사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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