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奉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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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보』 등을 춘추관과 지방 사고(史庫)에 보관하던 것.

개설

봉안은 보관한다는 뜻이면서 보관 대상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왕선후와 성현 등의 위패(位牌), 『선원보』, 어진(御眞) 등 왕실이나 나라의 중요한 기록과 제사에 관련된 물건을 보관할 때 봉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 정본(正本)을 인출하여 장황(裝䌙) 즉 제본을 마치면 『조선왕조실록』 간행이 완료되는데, 이때 실록청에서는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사고에 봉안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춘추관 외에 지방 네 곳의 사고에도 봉안되었는데 임시로 춘추관에 봉안하였다가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 차례로 각 사고에 봉안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봉안을 마친 후에는 선왕의 행장(行狀)과 지문(誌文)·시책(諡冊)·애책(哀冊) 등을 인출한 『조선왕조실록』 부록 한 부를 왕에게 진상하였다.

연원 및 변천

봉안이 언제부터 정식화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조대왕실록찬수청의궤(仁祖大王實錄纂修廳儀軌)』나 『순종대왕실록청의궤(純宗大王實錄廳儀軌)』까지는 봉안에 관한 문서가 수록되어 있는 한편, 『헌종대왕실록청의궤(憲宗大王實錄廳儀軌)』나 『철종대왕실록청의궤(哲宗大王實錄廳儀軌)』는 봉안식(奉安式)이라는 항목이 별도로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일정한 예식으로 정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절차 및 내용

봉안식에 따르면, 실록청 총재관 이하 관리들이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실록청에 모였다. 어람 부록과 『조선왕조실록』을 담은 상자는 채여(彩輿)에, 초초(初草)와 중초(中草) 등의 사초는 가자(架子)에 실었다. 고취(鼓吹)가 연주되면 상마대 및 인로군, 향정, 고취의 순으로 행진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실은 채여는 인정전 월대(月臺) 위의 임시 봉안처에, 어람 부록을 실은 가자는 연영문(延英門) 바깥에 봉안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넣은 상자와 초기(草記)는 승정원에 바쳤다. 총재관 이하 관원은 사고에 4배를 올렸고, 예를 마친 뒤 『조선왕조실록』을 담은 상자는 임시로 봉안한 뒤 사고를 봉인하였다.

『영조실록』의 사례를 통하여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봉안식과 비교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기 위해 실록청에서 길일(吉日)을 택하여 아뢰는데, 길일은 택일한 후에 왕의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가는 동가(動駕) 같은 일이 발생하면 다시 택일하게 된다. 『영조실록』의 경우 1781년(정조 5) 6월 20일에 『영조실록』 415권의 장황을 마치고, 춘추관에서 6월 21일 『영조실록』의 봉안 길일을 7월 3일로 추택하였다. 그러나 『영조실록』 봉안 하루 전인 7월 2일에 『영조실록』 봉안일이 동가와 겹쳐 7월 6일로 다시 택일하였다. 『영조실록』은 7월 6일에 춘추관에 봉안하였는데, 이때 7월 1일에 장황을 마친 『경종수정실록』 15권도 함께 봉안하였다(『정조실록』 5년 7월 6일).

『조선왕조실록』이 완성되면 『조선왕조실록』 찬수를 위해 옮겨 왔던 『승정원일기』를 승정원으로 돌려보내고, 시정기를 비롯한 『조선왕조실록』 찬수와 인출 과정에서 사용된 종이를 세초(洗草)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한 후 세초할 때까지는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 기록물들을 실록청에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이에 춘추관 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할 때 함께 보내어, 세초할 때까지 잠시 보관해 두는 것이 전례였다. 이때 사고의 2층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고 아래층에는 세초할 기록물을 궤에 담아 두었다.

『영조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영조실록』이 완성되기 이전에 산절(散節)을 마친 시정기를 예문관 사각(史閣)의 누상고(樓上庫)에 봉안한 일이 있었다. 실록청 총재관은 시정기를 초절(抄節)하기 위해 각 방에 나누어 준 후 이미 찬수한 시정기가 한결같이 흩어져 있다며 봉안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시정기를 하나하나 단단히 저주지(楮注紙)로 봉하여 싸고 궤에 담았으며, 봉안 궤 안에는 약 가루를 넣고 자물쇠로 채웠다. 『경종실록』을 개수한 것은 간인할 때까지 배안상(排案床)에 봉안하고 유둔(油芚)으로 덮어 두었다가 춘추관에 봉안하였다.

외사고(外史庫)의 봉안은 당상관인 봉안사(奉安使)와 사관이 파견되어 수행하였다. 수행 관원은 관상감 관원, 서리, 고지기, 사령 및 군졸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외사고의 봉안식에 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대체로 춘추관 봉안과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실록청의궤에는 봉안 과정에 대하여 준비 과정, 절차, 인원, 예식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기초로 봉안식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서책 형식의 기록인 『국조보감(國朝寶鑑)』의 봉안을 기록한 『국조보감감인청의궤(國朝寶鑑監印廳儀軌)』도 남아 있으므로 비교하여 참고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인조대왕실록찬수청의궤(仁祖大王實錄纂修廳儀軌)』
  • 『경종대왕실록산절청등록(景宗大王實錄刪節廳謄錄)』
  •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 『순종대왕실록청의궤(純宗大王實錄廳儀軌)』
  • 『헌종대왕실록청의궤(憲宗大王實錄廳儀軌)』
  • 『철종대왕실록청의궤(哲宗大王實錄廳儀軌)』
  • 오항녕 역, 『(국역)영종대왕실록청의궤 (상)』, 민족문화추진회, 2007.
  • 오항녕 역, 『(국역)영종대왕실록청의궤 (하)』, 민족문화추진회, 2008.
  • 오항녕 역, 『(역주)선조실록수정청의궤』, 일지사, 2004.
  • 신병주, 「‘실록형지안’을 통해 본 『조선왕조실록』의 관리 체계」, 『국사관논총』102, 2003.
  • 신병주, 「『조선왕조실록』의 봉안의식과 관리」, 『한국사연구』115, 2001.
  • 신병주, 「왕실에서의 기록물 생산과 보존」, 『고문서연구』28, 2006.
  • 오항녕, 「실록-등록(謄錄)의 위계(位階)」, 『기록학연구』3, 2001.
  • 오항녕, 「실록의 의례성에 대한 연구-상징성과 편찬관례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26, 2003.
  • 조계영, 「조선 왕실 봉안 서책의 장황과 보존 연구-『선원계보기략』과 『국조보감』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6.
  • 조계영, 「조선시대 실록부록의 편찬과 보존-『단종대왕실록부록』을 중심으로」, 『한국문화』6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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