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청제(祈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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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상으로 입추가 지났는데 장마가 계속될 때나 국가적 주요 행사를 앞두고 나라에서 날이 쾌청해기를 기원하던 제사.

개설

기청제는 신라 때부터 국가적인 제사로 규정되어 시행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문(門) 이외에 개천을 비롯해 매우 다양하게 기청제가 시행되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문(門)이나 개천 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대상에게 제사를 행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문을 중심으로 하는 기청제로 획일화되었다. 문에서 거행한 것은 문이 소통의 장소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원 및 변천

기청제는 유사 이래 전세계적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출발은 홍수로부터의 재앙을 막기 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홍수를 막기 위한 기청제를 흔히 영제(禜祭)라 명명했는데, 영(禜)은 홍수 외에도 가뭄, 역병 등 여러 재앙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가뭄이나 홍수 모두 영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영제는 홍수 때 제사로 특정되어 갔고, 가뭄 때 지내는 제사는 우제(虞祭)로 불렸다. 한편 홍수를 막기 위한 기청제는 주로 문(門)이나 사(社)에서 거행되었는데, 특히 문제(門祭)를 영제로 명명하였다.

한국의 경우 문헌상으로 삼국시대부터 기청제가 시행되었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잡지(雜志)에 따르면 신라의 경우 대정문(大井門)·토산양문(吐山良門)·습비문(習比門)·왕후제문(王后梯門)에서 지내는 사성문제(四城門祭)와 견수(犬首)·문열림(文熱林)·청연(靑淵)·박수(樸樹) 등 네 곳의 개천에서 지내는 사천상제(四川上祭)가 행해졌는데, 이것이 기청제였다고 추정된다. 다만 사천상제의 경우는 가뭄에 대비한 제사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개천을 비롯해 사직이나 종묘·능묘·영전(影殿)·산천뿐 아니라 사찰 등지에서 기청제와 기우제가 거행되었다. 특히 의종 때에는 서울인 개경의 여러 문에서 영제를 지내는 의례가 정비되었다. 의종때 영제에 의하면,각각의 문마다 3일간 매일 제사를 지내고 한번 영제를 지내도 그치지 않으면 산천이나 악(岳)·진(鎭)·해(海)·독(瀆)에 3일간 빌며,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과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지방의 경우에도 성문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규정하였다.

조선 시대 기청제는 『세종실록오례의』나 『국조오례의』에서는 “구우영제국문의(久雨禜祭國門儀)”와 “구우주현영제성문의(久雨州縣禜祭城門儀)”로 규정되며 국가적 제사 중 소사(小祀)의 하나로 유지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홍수 때뿐 아니라 국가적 주요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날이 쾌청하기를 바라는 때에도 기청제가 시행되었다. 1411년(태종 11) 태종이 강무를 앞두고 기청제를 시행한 예라든지, 1457년(세조 3) 의경세자의 발인을 앞두고 사직에 기청제를 지낸 사례 등이 있다.

한편 조선 시대의 기청제는 고려 시대까지와 달리 개천에서 지내는 기청제가 점차 배제되어 갔다. 조선 전기까지는 태종대 기청법회(祈請法會)를 비롯해 세종대 기청불사(祈請佛事), 또는 기청태일초례(祈晴太一醮禮) 등과 같이 다양한 방법이나 다양한 대상으로 기청제가 행해졌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는 사문영제(四門禜祭) 중심으로 획일화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 시대 기청제는 1392년부터 1840년까지 연평균 0.4회가 시행되었고, 시기적으로는 7월~9월까지 가장 많이 시행되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기청제인 사문영제는 서울의 사대문인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숙정문에서 행해지며, 정3품 당하관의 관원을 파견하여 3일 동안 시행하였다. 3일간의 제사에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3차례에 걸쳐 사문영제를 지속하였다. 제사 때 신위(神位)는 도성 안쪽으로 향하게 하고, 제사는 문 위에서 거행하였다. 제사를 거행할 때 도성문의 개폐는 승정원의 보고와 국왕의 결재 과정을 통해서 결정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사문영제 때의 축판과 관련해서는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서 축판을 “모방산천지신(某方山川之神)”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영제의 대상이 각 문의 문신(門神)이기보다는 각 문의 방향에 해당되는 산천신(山川神)임을 의미한다. 이는 문이 단순히 통행이나 외부의 침략을 막아주는 방어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드나드는 소통의 장소로서, 재앙으로 막혀 있던 인간사가 문처럼 원활하게 뚫리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주목된 것이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권32, 雜志1 祭祀
  • 『國朝五禮儀序例』권1 吉禮, 祝板
  • 소신섭·김용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시대의 강수, 기우제와 기청제, 우박, 서리 및 안개」, 『한국기상학회 학술대회논문집』, 한국기상학회, 1997.
  • 최명림, 「문을 둘러싼 의례와 전망」, 『남도민속연구』16, 남도민속학회, 2008.
  • 최종성, 「한국 기청제 연구」, 『역사민속학』20, 한국역사민속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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