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신(山川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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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의 영역을 지배하는 신.

개설

산천신(山川神)은 만물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정령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산천의 우뚝 솟은 모습이나 끊이지 않고 흐르는 성질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또 식량이나 땔감, 식수나 농업용수 등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것도 산천의 소관으로 여겨졌다. 그런가 하면 산과 강은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의 생존은 산천신에 달려 있으며, 산천신은 자신의 영역 내의 인간들을 지켜준다는 믿음에서 산천신 숭배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산천신 관념은 고조선시대에 이미 존재했으며, 지금까지도 한국 민속종교의 중요한 신격으로 숭배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는 산천신이 국가 제사에서 중요한 신격으로 취급되어 왔다.

내용 및 특징

한국에서 산천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단군이 아사달의 산신으로 좌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천신 관념은 고조선시대에 이미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과 강은 수렵·어로 단계부터 삶의 터전이었으므로 산천 숭배의 기원은 채집 경제 단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채집 경제 시대 산천신은 산과 강의 주재자로 수렵과 어로의 성패를 좌우하는 신이었다. 그리고 그 형태는 동물의 모습이었다. 예컨대 산신은 호랑이 모습을, 강신은 비록 후대의 관념이지만 용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수렵·어로 단계에서 농경 단계로 전환하면서 산천신의 성격도 농경신으로 바뀐다. 즉 강우량을 조절하고 병충해를 방지함으로써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준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인간의 삶이 유지되도록 한다는 점에서 수호신으로 여겨져, 전쟁이나 질병으로부터 지역이나 국가를 지켜준다고 믿어졌으며, 집단이 유지될 수 있도록 자식을 점지해주는 것도 산천신이라 여겨졌다.

이와 같은 성격 변화와 함께 산천신의 형태도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고, 산천신 자체로 여겨졌던 동물은 산천신의 사자나 보조자로서 명맥을 유지한다. 또 산천신, 특히 산신의 성별도 변화한다. 고대의 산신은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고려시대 이후 남성 노인이 많아지고 여성 산신은 소수자로 남는다. 남성인 인간으로 바뀌면서 역사적 인물이 산천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예컨대 감악산신은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 순천 해룡산신과 인제산신은 각각 견훤의 사위 박영규(朴英規)와 박란봉(朴蘭鳳)이라는 전승이 그것이다. 산천신이 간여하는 풍요와 다산, 병화로부터의 수호 등은 개인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집단의 안위와 직결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산천신은 마을이나 지역 같은 공동체, 나아가 국가 차원에서 신앙되었으며, 이처럼 집단 차원의 신앙이란 점이 산천신 신앙의 특징이다.

변천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현 강원도)에서는 산천을 중시했다고 한다. 동예는 국가 이전 단계의 사회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공동체 사회에서 이미 산천신 숭배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 사회의 산천신 숭배는 국가 단계에도 계속되는데, 그 흔적을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 아사달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국가의 시조가 산신이 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고조선 시기에 국가 차원의 산천신 신앙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산천신 신앙의 존재가 보다 뚜렷해진다. 우선 고구려에서는 시조 주몽의 어머니가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이었으며, 산천신에게 자식 점지를 빌거나 기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매년 3월 3일에는 낙랑 언덕에서 천신과 함께 산천신을 제사했다고 한다. 백제에는 국도 주변의 3산과 영토 내의 5악을 숭배했던 흔적이 있으며, 산천에 비를 빌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 중에서도 신라는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 산천신 신앙이 성행했다.

신라에서 산천신은 특히 국가의 수호신으로 여겨 국가에서 산천신들을 제사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산천신에 대한 국가 제사를 더욱 제도화하여, 산천신 제사를 대사·중사·소사로 등급화하고 등급에 따라 제사의 규모나 격식을 달리했다. 신라의 대사·중사·소사에서 대사에는 3산, 중사에는 5악(岳)·4진(鎭)·4독(瀆)·4해(海) 등, 소사에는 24산을 포함시켰다. 국가 제사의 대상을 대·중·소사로 등급화한 것이나 산천을 악(岳)·진(鎭)·독(瀆)·해(海)로 구분하는 것은 중국 사전(祀典)의 영향이다. 그러나 대·중·소사의 대부분을 산천신으로 구성한 것은 신라만의 특징인 동시에 신라에서 산천신 신앙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이처럼 산천신 신앙이 성행했기에 신라에서 산천신은 불교 수용 이후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이는 산천신의 수호신적 기능을 불교적으로 변용시킨 것이라 하겠다.

고려시대 산천신 신앙의 성행은 평나산과 지리산의 산신이 고려 왕실의 조상이라는 전승, 삼한 산천의 도움 덕분으로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다고 한태조의 훈요10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고려에서는 산천신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거행했는데, 그것은 두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유교식 제사로서 990년(고려 성종 9) 제도와 규정이 마련되었다. 유교식 제사 대상은 영험이 인정된 산천신에 한정되었으며, 이들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수시로 봉작을 수여하는 등 특별 취급을 했다. 봉작은 산천신의 위상을 나타내며, 나아가 지역민의 자존심과 관련되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자기 지역 산천신을 사전(祀典)에 등재하고 봉작을 올리기 위해 경쟁을 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 제사의 대상은 갈수록 증가했다. 산천신 제사에는 전국의 산천신을 중앙에서 함께 제사하는 합사(合祀)와 소재지에서 각각의 산천신을 제사하는 별사(別祀)가 있었는데, 별사의 제관은 소재지의 지방관이 담당하기도 하고 중앙에서 제고사(祭告使)를 파견하기도 했다. 제사의 목적은 외적 퇴치나 전승 기원, 풍년 기원, 질병 치유 등이 있었지만,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은 기우를 위한 것이었다. 고려시대 산천신 제사의 특징은 중국의 유교식 제도를 도입하였음에도 대·중·소사로 등급화되지 못하고, 기타 제사를 의미하는 잡사(雜祀)로 취급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의 산천신 제사는 불교와 토착 신앙의 혼합식이다. 혼합식으로는 팔관회를 들 수 있는데, 팔관회는 천령(天靈)과 함께 5악·명산대천·용신을 모시는 국가적 행사이기 때문이다. 또 묘청이 1139년(고려 인종 9) 서경의 팔성당(八聖堂)에 모신 8위의 산신도 같은 범주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 제사에서 산천신을 모시는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 왕조로서는 고려시대의 산천 제사를 그대로 계승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의 산천제에는 비유교적 요소가 많을 뿐만 아니라 개성을 중심으로 한 산천 제사로 편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 왕조로서는 새로운 산천제의 정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태종 때부터 산천제 개정에 착수했고, 세종 때에는 지방에 수시로 산천단묘순심별감(山川壇廟巡審別監)을 파견하여 지방의 현황을 파악한 바탕 위에서 산천제의 틀을 확정해 나갔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산천신들을 대·중·소사 체계에 맞춰 등급화했다. 산천신의 등급화는 1414년(태종 14)에 시행되었는데, 산천신들은 중사와 소사에 편재되었다. 둘째, 같은 해에 산천 제사의 구체적인 절차인 의주(儀註)를 확정하였다. 셋째, 신에게 작위를 주는 것은 불경이라 하여 산천신의 봉작을 폐지했으며, 신상을 철거하고 위패로 산천신을 모시게 했다. 넷째, 새 도읍 한양의 목멱산·삼각산·한강을 국가 제사의 대상으로 편입했다. 다섯째, 산천신에 대한 비유교적 의례나 개인적 의례를 음사(淫祀)라 하여 금지했다. 『세종실록』 「오례」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반영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이상의 산천신은 국왕의 명의로 제사되었다. 다시 말해 이들에 대한 제사는 국행제(國行祭)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는 이밖에도 많은 산천신들의 영험성을 인정하였고, 이들에 대해서는 지방 수령으로 하여금 제사토록 하였으니 소재관행제(所在官行祭)라는 것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산천제에도 중앙에서의 합사와 소재지에서의 별사가 있었다. 중앙에서의 합사로는 우선 산천단 제사가 있었다. 산천단은 도성의 남쪽에 있어 남단(南壇)이라고도 하는데, 풍운뇌우신을 중심으로 산천신과 성황신을 함께 모신 제단이다. 이러한 방식은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중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서는 1370년(고려 공민왕 19) 고려에 강요했고 조선 왕조에서도 이 제도를 답습했다. 그런데 『홍무예제』는 중국의 지방 제사에 대한 규정이기 때문에 국가의 예제에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또 천신인 풍운뇌우와 지신인 산천신을 함께 모시는 것은 유교적 신 관념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천단의 문제가 세종 때 민의생(閔義生)이나 박연(朴堧)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조선 왕조를 통해 이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산천단에서의 제사는 정기적인 것과 부정기적인 것이 있다. 정기제는 중춘인 2월과 중추인 8월에 길일을 택해 제사했으며, 부정기제는 비상시에 수시로 거행되었는데, 가뭄을 당했을 때 산천단 제사는 기우제 차례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다. 또 북교단(北郊壇)에서도 산천신의 합사가 행해졌는데, 그것은 가뭄 때만 거행하는 비정기적 제의였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울의 단묘(壇廟) 가운데 악해독단(嶽海瀆壇)과 명산대천단이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에 비해 산천의 소재지에서 거행되는 별사의 경우 중앙에서 파견된 행향사(行香使)나 지방관이 주재하는데, 여기에도 춘추의 정기제와 비상시의 비정기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산천신에게 기원하는 가장 큰 목적은 기우였으며, 산천단·북교단과 서울의 삼각산·목멱산·한강 등은 기우제 차례에서 반드시, 그것도 반복해서 제사하는 곳이었다.

국가 제사로서의 산천제는 한말 국가 제사의 폐지와 함께 중단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의 산천제는 조선 왕조의 음사 탄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여, 현재에도 가장 대표적인 공동체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의의

산천신은 지역 공동체의 신앙으로서, 그 영험성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제공한다. 또 신앙의 공유는 집단 구성원의 일체감을 조성하여 집단의 통합과 결속에 기여한다. 한편 국가 차원의 신앙으로서도 이상과 같은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국가 제사의 대상으로서의 산천신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첫째, 산천은 곧 지역을 상징하는데, 산천신을 대·중·소사란 하나의 체계 속에 편재한다는 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체제를 뒷받침한다는 의미가 있다. 둘째, 국가 제사에 포함된 산천신의 사지(四至)는 해당 시기의 영토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 산천신의 분포는 신라인의 영토 의식을 보여주며, 백두산이 1437년(세종 19) 국가 사전(祀典)에서 제외되었다가 1767년(영조 43)에 다시 편입되는 것은 조선시대 영토 의식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김철웅, 『한국중세의 길례와 잡사』, 경인문화사, 2007.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 허흥식, 『한국 신령의 고향을 찾아서』, 집문당,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