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제(禜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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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

개설

유교적인 의식과 절차에 따라 시행된 기청제(祈晴祭)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장마가 지속되어 농사를 망칠 우려가 있을 때 왕명에 의해 시행되기 때문에, 제사의 시기는 대개 5월∼8월에 집중되었다. 서울의 각 성문에서 3일 동안 매일 제사를 지내는데, 비가 그치지 않으면 다시 산천과 악해독(嶽海瀆)에 3일간 기도하였다.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고, 각 주현에서는 성문에 영제를 지내고 경내의 산천에 기도하였다. 그밖에 왕이 강무(講武)를 행하기 위하여 도성을 떠나거나 국상(國喪)을 당해 왕이나 왕비의 운구를 옮길 때, 선왕의 부묘(祔廟)를 시행할 때 등 중요한 국가 행사가 있을 때 기청제를 지냈지만 영제라고는 하지 않았다. 영제는 오랫동안 비가 올 경우에 지내는 기양제(祈禳祭)였다.

영제는 조선초기부터 시행되었는데, 별도의 제단을 마련하지 않고 성문에 임시로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방식은 『세종실록』 「오례」와, 이후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길례」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삼국시대의 경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영제에 관한 기록이 없고, 비록 장마가 계속될 때 기청제를 지냈다 하더라도 유교적인 의식에 따라 시행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영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 따르면, 영제는 소사(小祀)에 편입되었으며, 국문(國門)에 영제를 지내는 의식인 영제국문의(禜祭國門儀)도 정해졌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기청제의 대상은 종묘와 사직을 비롯하여, 불우(佛宇)·신사(神祠)·왕릉 등 다양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속 신앙의 면모를 지닌, 강 위에서 시행하는 기청제가 많아 유교적인 의식인 영제의 비중이 절대적이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08년(태종 8), 오랜 장마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도성의 사대문에서 영제를 처음 시행하였다(『태종실록』 8년 7월 23일). 다음 해에는 동문(東門)에서 영제를 행한 뒤, 남문·서문·북문에서 차례로 제사를 지냈다(『태종실록』 9년 5월 11일). 장마가 심할 때 성문에서 영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영제는 1413년(태종 13) 4월에 여러 국가 제사의 등급을 결정할 때 소사로 규정되었고, 다음 해 9월에 국문에 영제를 지내는 의주인 구우영제국문의(久雨禜祭國門儀)가 마련됨으로써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이때 정해진 의주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에 수록됨으로써, 이후 시행되는 영제의 기본 의례가 되었다.

영제는 기존에 사찰에서 시행되던 기청제를 대신하였을 뿐 아니라, 종묘·사직·산천 등 유교적인 대상에 대한 제사와 연결되어 시행됨으로써 유교적 예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절차 및 내용

영제는 소사에 해당하므로 3품관 1명이 제관(祭官)으로서 의식을 주관하였다. 지방의 경우 본읍(本邑)의 수령(守令)이 담당하였다. 도성의 사대문에서, 지방의 경우 성문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돼지 1마리를 희생으로 삼았다.

영제는 기제(祈祭)의 일종으로, 의식 절차는 간단하다. 제사 하루 전에 제관의 위차(位次)·신좌(神座)·제기(祭器) 등을 진설(陳設)하고, 당일 제찬(祭饌)이 마련되면 의식을 시작한다. 의식 과정에서 일반적인 제사와 달리 폐백을 드리는 전폐례(奠幣禮)를 시행하지 않고, 작헌례(酌獻禮)는 1헌에 그친다. 세 차례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린 뒤 축문을 읽으면 예가 끝난다. 폐백을 올리지 않으므로, 헌관이 폐백을 구덩이에 묻는 것을 보는 망예(望瘞)의 과정 역시 생략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사기(史記)』
  • 이범직, 『韓國中世 禮思想硏究』, 일조각, 1991.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작과비평사, 2009.
  • 한형주, 『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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