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제(端午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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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5월 5일에 지내는 속절(俗節) 제사.

개설

단오(端午)는 다른 말로 포절(蒲節)이라고도 한다. 단오절은 속절이기 때문에 단오제는 절제(節祭), 즉 속절 제사다. 제사는 돌아가신 날 이외에 철이 바뀔 때마다 사당이나 선영에 차례를 지내는 날이 있는데, 곧 음력 설날·한식·단오·추석·중양·동지가 이에 해당한다.

속절제는 속제(俗祭)라고도 한다. 단오는 설날인 정조(正朝)·한식·추석 등과 함께 사명일(四名日)이라고도 하고, 한식·추석·동지 등과 함께 사중월속절(四仲月俗節)이라고 하는 풍속 상의 명절이다. 절일(節日)이라고 할 때는 이것 외에도 원단(元旦)·상원(上元)·상사(上巳)·욕불(浴佛)·유두(流頭)·중양(重陽)·납평(臘平) 등이 포함된다.

민간에서의 단오제는 조선중기까지 고을을 단위로 행해졌고, 이때의 주된 신은 고을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성황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이러한 단오제는 음사(淫祀)로 여겨져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몇몇 고을을 제외하고 대부분 소멸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 말경에 단오제를 섭사행(攝事行), 즉 신하를 보내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1402년(태종 2) 상왕인 정종이 제릉(齊陵), 즉 신의왕후(神懿王后)한씨 무덤에서 단오제를 지냈다는 기사가 나온다(『태종실록』 2년 5월 4일). 왕은 그날 사정에 따라 직접 능에 행차하거나 아니면 신하를 보내 제사를 섭행(攝行)하였다.

1763년(영조 39)에는 왕이 사정전의 숭현문에 나아가 태묘(太廟)와 각릉(各陵)·전(殿)의 단오제에 쓸 향을 공경히 맞았다고 하였다(『영조실록』 39년 5월 4일). 즉 이때는 역대 각 왕의 능이나 전에 제사를 올렸는데, 각 능의 제사 진행은 헌관 등으로 파견한 신하들과 능을 관리하는 별검에게 맡겼다.

민간 차원에서의 속절에 대한 규정은 각자의 출신 배경이나 학문 배경에 따라 첨삭을 가하면서 형성되어 왔다. 예를 들면 사명일도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는 단오 대신 동지를 넣고 있다. 이는 밭농사를 주로 해오던 조선중기까지와는 달리 논농사의 비중이 커진 조선후기의 중부 이남 지역에서 절일로서의 단오의 비중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석전(石戰), 또는 편전[邊戰]이라고 하는 놀이는 김해 지방에서는 오월 단오에 행하지만 그 나머지 지역에서는 대개 정월 보름밤(서울)이나 16일(안동)에 많이 한다. 그러나 이색(李穡)의 『목은고(牧隱藁)』를 보면 당시는 대부분 지역에서 단오 때 한 것으로 나와 이 역시 단오의 쇠퇴와 관련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절차 및 내용

태조·세조·원종·숙종 등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에서 가졌던 1748년(영조 24) 5월 4일의 단오제를 참고하면, 그 개략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① 왕이 면복을 갖추고 재실에서 나와 전의 동문 밖으로 가서 망전례(望殿禮)를 행하였다. ② 왕이 네 번 절하고 나서 전의 동문을 경유하여 제 일실에 들어가서 차례로 봉심한 다음 재실로 돌아왔다. ③ 영희전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재전(齋殿)에서 청재(淸齋)하였다(『영조실록』 24년 5월 4일).

이재(頤齋)황윤석(黃胤錫)은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 37세 되던 해인 1765년(영조 41) 단오절 전날부터 다음 날까지 숭릉(崇陵), 즉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 단오제의 찬자(贊者)로 참석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단오절 전날인 5월 4일에 왕으로부터 향(香)을 받고 헌관과 함께 숭릉으로 떠났다. 동대문 밖 관왕묘 근처에서 아침을 먹고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여 능 아래에 도착하였다. 능에서 다른 능 제사를 맡은 헌관과 별검들을 만났다.

○ 숭릉의 단오제는 다음 날 새벽 3시경에 끝났다. 지인들과 아침을 먹었다. 단오절 당일에는 왕이 친히 임해 행하는 강무(講武) 행사가 있다. 왕이 먼저 활을 쏘고 다음에 제군(諸君)과 제장사(諸將士), 일반인이 차례로 수렵하는 행사로서, 매년 단오절과 추석절 두 차례 거행한다. 이날 국왕은 쑥으로 만든 호랑이인 애호(艾虎)를 각신(閣臣)에게 내리는데, 짧은 볏짚 새끼줄로 채화(綵花)와 함께 묶은 모양이 여뀌 이삭처럼 무성하다. 또한 새로 만든 부채를 나누어 주는데 이것을 단오선(端午扇)이라고 한다. 영남·호남의 병사와 수사들은 조정 대신이나 친구에게 부채를 보내는데, 전주와 남평에서 만든 것을 가장 좋게 여긴다.

단오를 민간에서는 수릿날[戌衣日]이라고 한다. 술의(戌衣)는 우리말로 수레[車]다. 여항에서는 부녀자들이 곳곳에서 그네뛰기[秋千戱]를 한다. 장안의 소년들은 남산 기슭에 모여 어울려 씨름을 한다. 내의원에서는 옥추단(玉樞丹)을 제조한다. 이것을 차고 다니면 재액이 물러난다고 믿는다. 관상감에서는 주사(朱砂)로 벽사문(辟邪文)을 찍는다. 이것을 문 상방에 붙인다.

민간의 단오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중기까지 고을 행사로 치러져 오던 것인데, 조선후기에는 이를 음사로 취급하여 대부분 지역에서 그 전통이 단절되었다. 다음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인용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군현 단위 단오제의 내용이다.

○ 경상도 군위 지방 풍속에 효령현의 서쪽 산에 김유신(金庾信) 사당이 있는데 속칭 삼장군당(三將軍堂)이라고 한다. 매년 단옷날에 그 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인 이방이 읍내 사람들을 인솔하여 역마를 타고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며 사당으로 올라가서 신을 모시고 내려와 마을 거리에서 논다.

○ 강원도 삼척 지방 풍속에 읍내 사람들이 오금(烏金)으로 만든 비녀를 조그만 함에 담아 관아의 동쪽 모퉁이에 있는 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다가 매년 단오에 아전과 읍민들이 함께 그것을 꺼내어 제사를 지내고 다음 날 도로 가져다가 감추어 둔다. 속설에 그 오금 비녀는 고려 태조 때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알지 못하고 그냥 전래 행사가 되어 버려 관에서도 이를 금하지 않는다.

○ 함경도 안변 지방 풍속에 상음현의 상음신사(霜陰神祠)가 있는데 속설에 안변도호부의 성황신인 선위대왕(宣威大王)의 부인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한다. 매년 단옷날이 되면 성황사의 선위대왕신을 이 신사로 모셔 부부를 함께 제사지낸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나오는 「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 幷序)」는 강원도강릉단오제의 전말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1603년(선조 36) 여름에 명주(溟州: 현 강릉)에 있을 때였다.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을 맞이한다고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에게 물으니, 수리가 대답하기를,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대장군김유신(金庾信)입니다. 공이 젊어서 명주에서 공부할 때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이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을 내면 칼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런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기[旛], 일산[蓋], 향화(香花)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이하여 명주부사(溟州府司)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날 갖은 놀이[雜戱]로 신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이 쓰러지지 않아 그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해는 반드시 풍재(風災)나 한재(旱災)가 있답니다.’고 하였다. 나는 이를 이상히 여겨 가서 보니 과연 기울어지지 않는지라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목은고(牧隱稿)』
  •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재난고(頤齋亂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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