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료(救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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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치료할 능력이 없는 백성들을 구원하여 병을 고쳐 주는 일.

개설

구료(救療)는 백성들에 대한 의료적 구휼이다. 조선시대의 대민 의료는 왕실에서 백성에 대해 은혜를 베푸는 일종의 시혜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구료는 이러한 조선시대 대민 의료 체계의 성격을 대변하는 용어이다. 구료의 실제는 법전에 기초한 대민 의료 기구 및 일련의 의료 제도와 자연재해·인재 등의 요인으로 발생한 기근·질병 등 각종 재난 상황에 대한 조치를 통해 확인된다.

연원 및 변천

구료의 법제적 틀은 의료 제도를 명문화한 조선시대 4대 법전, 즉 『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경국대전』의 간행 이전에는 『경제육전』·『속육전』에 구료 조항이 명기되어 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대민 의료 기구는 고려시대의 명칭을 계승·편제하여 1392년(태조 1)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1395년(태조 4) 혜민국(惠民局), 1397년(태조 6) 제생원(濟生院)이 각각 설치되었고, 이후 통합과 명칭 변경 등을 거쳐 대민 구료를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의 모태가 되었다.

혜민서는 평시에는 의약 지급, 구료의 중심 기관으로 활동하였고, 재난 시에는 각각 시기별로 제생원·전의감(典醫監)과 함께 구료에 필요한 약품의 제조 및 관리, 의서의 하송(下送) 등을 전담하였다. 활인서는 기민(飢民)과 병자의 조호(調護) 기구로서 그 장소는 사료별로 달리 확인되는데, 동소문과 서소문 밖 등 동서에 각각 1곳씩 설치하였다. 지방에는 각 도에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 태종대에 의관교유로 명칭 변경) 1원을 두고 각 계수관(界首官)마다 의원 1개소를 두어 생도를 교수하도록 하여 병자들을 구료하게 하였다.

대민 의료 기구의 대표적인 혜민서·활인서의 양 의사는 계속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고종대에 이르러 전의감에 합속되면서 폐지되었고, 1885년(고종 22)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인 광혜원(廣惠院) 설치 건의에 이르렀다.(『고종실록』 22년 2월 29일) 조선시대 전반의 중앙 의사의 혼란 속 존속과 함께 지방민에 대한 구료 역시 의생(醫生)과 약재의 공납을 관리하였던 심약(審藥)을 주축으로 한 기초적인 구료 외에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절차 및 내용

혜민서·활인서로 대표되는 대민 의료 기관과 의원·의생·심약·약부(藥夫) 등의 인력을 기초로 한 평시의 구료 조항은 법전의 『예전』 혜휼조(惠恤條)에 명기되어 있다. 걸인·무의탁자·고아 등에게는 기초적인 양료(糧料)를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병자는 행정 기관 즉 중앙의 오부(五部), 지방의 본읍에 신고하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무격(巫覡)은 서울의 본조와 지방의 본읍의 장적(藏籍)에 기록하여 병든 사람을 치료하게 하고 병자가 의원을 요구하면 즉시 치료를 하게 하였으며, 이를 게을리하면 고발 조치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특히 서울과 지방의 한증소(汗蒸所)와 온정(溫井)은 일반민도 일정한 관리하에 그 이용이 허용되었는데, 온정이 있는 곳의 수령은 병든 사람을 구호하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한증소는 서울 안에는 활인서에 부속된 곳과 성 안팎에 2곳을 설치하게 하여 한성부 내에 최소 5개 이상의 한증소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재난 상황은 기근과 전염병·자연재해 등에 따른 기민과 질병자의 대규모 발생으로 나타났는데, 이때 왕실은 재난의 경중을 고려하여 구료 대책을 실시하였다. 먼저 재난 대책의 기준은 이전에 유사한 선례가 있었는가를 찾아보고 그에 대한 선왕의 예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다음은 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행정적인 지침이 하달되었다.

구료 시책의 실질적인 방법은 약품·의서·의원·신앙 등으로 요약되며, 구료 대책의 전개에 있어서도 일정한 체계를 보이고 있었다. 해당 지역의 관찰사와 고을 수령을 행정 체제로 하여 해당 지역 내 의료 인력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이었다. 여기서 동원되는 의료 인력은 상황의 경중에 따라 각각 의생과 무격·심약·의학교유 등이 본도에서 각 고을로 파견되었다.

각 지방의 자치적인 구료에 대해 중앙에서는 구료 조항을 지시하고 약재와 의학 방서를 하송하여 이를 보조하였다. 각 행정 구역별로 고을의 수령이 중심이 된 구료 활동에 필요한 약품 및 약재의 조달은 가장 기본적인 의료적 구휼의 형태였다. 위와 같은 과정을 행하였는데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드러난 해골과 시신을 묻어 주고 경죄인(輕罪人)을 석방하여 억울한 기운이 미치지 않도록 하였다. 그와 함께 종교적인 의례를 시행하였는데, 조선초에는 수륙재(水陸齋)를, 이후에는 사람에게 해를 주는 신에게 제사하는 여제(厲祭)를 주로 시행하였다.

그 밖에 기근 시 진제장(賑濟場) 또는 진제소(賑濟所)를 설치하여 기민을 구휼하는 조치가 있었고, 역병 발생 후 피막(避幕) 또는 병막(病幕)을 만들어 환자들을 정상인과 격리하여 전염을 막는 임시적인 대처 방법도 행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시대 구료 조치 중 하나로 각 지역에 하송된 의서와 방문(方文)은 언해되고 유포되어 오늘날까지 민간요법서의 연원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치료를 위한 종교 의례로서의 무속 의례는 국가에서 무격을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이들의 운신 폭을 공식적으로 축소함으로써 점차 배제되었다. 그러나 한말까지도 무격을 통한 왕실의 내행 의례 및 민간의 개인적인 치병 의례로서의 병굿은 지속적으로 행하여진 것으로 보아 민간의 치병굿의 오랜 연원 역시 이와 같은 구료의 역사 속에서 추측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김두종, 『한국의학사』, 탐구당, 1966.
  • 홍순원, 『조선보건사』, 북한과학백과출판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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