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림(擧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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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나 왕후가 승하한 날에 종친 문무백관이 모여 곡을 하고 위문하는 의절.

개설

국상(國喪)에서 종친 및 문무백관 등이 모여 곡을 하고 왕 또는 왕비, 왕세자 등에게 위문하는 의절이다. 거림을 행하기 전에는 세자와 대군 이하 및 왕비·세자빈·내명부·외명부 등이 자리를 정하고 곡을 하는 위위곡(爲位哭) 절차가 진행되었다. 종친 및 문무백관이 곡을 한 후에는 반열의 우두머리가 먼저 왕비에게 자신의 이름을 아뢰고 위문하였다. 왕비나 세자빈 등의 국상으로 내상(內喪)인 경우 왕, 왕세자의 순으로 위문한다. 빈소가 차려지는 제5일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거림의 절차는 조선시대 내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시대의 국가 전례(典禮)를 기록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인 『세종실록』「오례」를 비롯해, 성종대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영조대의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정조대의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 및 『춘관통고(春官通考)』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의례를 담당한 관직의 명칭과, 거림에 참여한 사람들의 복식에는 일부 변화가 있었다. 『세종실록』「오례」에 따르면 종친과 문무백관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참여하였으나, 『국조상례보편』에는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의례에 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절차 및 내용

『세종실록』「오례」에 따르면, 거림하는 절차는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백관, 감찰(監察) 등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부복하고 곡을 하는 절차, 반열의 우두머리가 왕 또는 왕비 등에게 이름을 아뢰고 위문하는 절차로 이어진다.

의례 절차를 살펴보면, 왕 또는 왕비가 승하한 당일에 전의는 종친, 문무백관의 자리를 품등(品等)에 따라 바깥뜰[外庭]에 설치하는데 문관은 동쪽, 무관은 서쪽에 설치한다. 종친의 자리는 관품(官品)마다 반열의 앞부분에, 대군(大君)의 자리는 정1품의 자리 앞에 설치한다. 이하 감찰, 전의, 통찬(通贊), 봉례랑(奉禮郎) 등의 자리를 각각 설치한다.

감찰, 전의, 통찬, 봉례랑이 먼저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고, 종친 및 문무백관이 소복(素服)을 입고,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 차림으로 자리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곡을 하며 극진한 애도를 표한다. 통찬이 ‘지곡(止哭)’이라 창(唱)하면 곡을 그친 후 네 번 절하고 몸을 바로 한다. 종친, 문무백관이 동쪽으로 옮겨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 반열의 우두머리인 반수(班首)가 이름을 아뢰고 위문한 후 나간다.

지방의 경우, 각 도(道)의 대소사신(大小使臣)과 외관(外官)들도 문서가 도착한 날 정청(政廳)에 향탁(香卓)을 설치해 놓고 소복 차림으로 뜰로 들어가는데, 사신은 동쪽에, 외관은 서쪽에 북향하여 무릎을 꿇고 앉는다. 집사자(執事者)가 향을 올리고, 모두 엎드려 곡을 하여 극진한 애도를 표한 후 네 번 절한다. 이들은 부고(訃告)를 들은 지 6일 만에 성복(成服)한다. 성복하는 날 새벽에는 정청에 향탁을 설치한다. 이때 소복을 벗고 참최(斬衰)를 입는데, 내상인 경우에는 재최(齊衰)를 입는다. 이어 뜰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집사자가 향을 올리면 모두 엎드려 곡을 하여 극진한 애도를 표하고 네 번 절한다.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 절제사(節制使), 처치사(處置使), 목사(牧使) 이상의 관원은 사람을 보내 전문(箋文)을 올려 조위(弔慰)의 뜻을 표하여 아뢴다.

관련 사항

중국 황제나 황후의 부고를 받은 후에도 성복부터 제복(除服)까지 거림의(擧臨儀)를 행하는데, 전(殿)의 한 가운데 향안(香案)과 칙안(勅案) 등의 상을 설치해 놓았다. 이때 왕은 엎드려서 15번 곡성(哭聲)을 올렸으며, 왕세자 및 종친 문무백관도 함께 곡을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
  • 『춘관통고(春官通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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