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역(함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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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의 도로망인 거산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신은역(新恩驛)은 조선초기 태조 때 동북 지방의 역을 정비하고 신설하는 과정에서 설치되었다. 그 뒤 세조 때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하면서 거산도(居山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로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초기인 1396년(태조 5)에는 고려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인 5도양계(五道兩界)를 개편하고 서북면의 군현을 새롭게 개정하였다. 뒤이어 1398년(태조 7)에는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삼아 영흥도(永興道)·길주도(吉州道) 등의 군현을 개편하면서, 동북 지방의 역을 정비하고 신설하였다(『태조실록』 6년 12월 22일). 그 과정에서 신익참(新翼站)은 신은참으로 개칭되어 함경도 홍원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참’을 ‘역’으로 통일함에 따라 다시 신은역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동북면도선무순찰사 정도전이 동북 지방을 순찰한 후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명칭을 정하여 아뢴 바에 따르면, 태조대의 신은참에는 사리(司吏) 2명, 일수양반(日守兩班) 5명, 관부(館夫) 5명, 급주인(急走人) 5명, 마부(馬夫) 15명 등의 역민이 배정되어 있었다. 그 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홍원 편에 따르면, 신은역에는 상등마 2필, 중등마 11필, 하등마 15필 등 총 28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683명, 역노(驛奴) 302명, 역비(驛婢) 183명이 있었다.

변천

1421년(세종 3)에는 함길도의 역로를 고산도(高山道)·시리도(施利道)·주천도(酒泉道) 등 3개의 역도로 편성하였고(『세종실록』 3년 6월 2일), 6진 개척이 거의 마무리된 1440년(세종 22)에는 홍원현 신은참에서 길주 고참(古站)에 이르는 21개 참을 거산도로 삼아 찰방(察訪)의 주관 아래 운영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2년 2월 4일). 또한 1447년(세종 29)에는 역참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홍원현 함관령(咸關嶺) 아래에 신설한 함원참(咸原站)을 혁파하고 덕산참(德山站)을 함흥부 송현(松峴) 서쪽의 고성평(古城平)으로 이설했는데, 이때 신은참은 문암(門巖)으로 이설되었다(『세종실록』 29년 1월 14일). 그 뒤 세조 연간에 전국의 역로를 44역도-537속역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거산도에 속하게 되었고, 『경국대전』에 수록되면서 신은역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으나,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은역은 『여지도서』에 따르면, 홍원현 관아 서쪽 5리 신익사(新翼社)에 있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홍원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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