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평군 이원생(義平君 李元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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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1년(세조 7) = ?]. 조선 전기 태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1왕자. 봉작(封爵)은 의평군(義平君)이다. 자는 회원(晦源), 서하재(棲霞齋)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지성빈(池誠嬪)인데, 숙의(淑儀)였다가 성빈(誠嬪)이 된 것 같다. 지성빈은 충주 지씨(忠州池氏)로서 고려 문하성(門下省) 찬성사(贊成事)지윤(池奫)의 딸이다. 지성빈은 5남 1녀를 낳았는데 의평군이원생은 그 중 맏아들이다. 동복 아우는 선성군(宣城君)이무생(李茂生), 덕천군(德泉君)이후생(李厚生), 임성군(任城君)이호생(李好生), 도평군(桃平君)이말생(李末生)이고, 동복누이는 함양옹주(咸陽翁主)다. 정종은 적실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장례와 제사 때에 의평군이원생이 맏아들 역할을 하였다. 지윤의 맏딸은 태조이성계(李成桂)의 맏아들 진안대군(鎭安大君)이방우(李芳雨)의 정실부인이 되었으나, 지성빈은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의 후실(後室)이 되었다. 고려 우왕 때 지윤이 최영 · 이성계에게 패망한 뒤에 지씨 집안이 몰락하여 후실이 된 것 같다. 지성빈은 이방과가 정종이 되자, 후궁으로 봉해졌다.

태종~세조 시대 활동

1412년(태종 12) 5월 이복동생 이군생(李群生)과 함께 부정윤(副正尹)이 임명되었다가, 정윤(正尹)으로 승진되었다. 1417년(태종 17) 9월 종친들에게 봉작을 내릴 때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의평군에 진봉(進封)되었다. 1419년(세종 1) 9월 부왕 정종이 승하하자, 정종은 적출 왕자가 없었으므로, 서출 제 1왕자인 의평군이원순이 대리 상주인 섭상주(攝喪主)가 되어서, 장례를 주관하였다. 1421년(세종 3) 세종 초기 정종의 3년 상기를 끝마치자, 당시 태상왕(太上王)으로 있던 태종이 잔치를 열고 정종의 아들 11왕자들을 위로하였다.

1421년(세종 3) 11월 태상왕 태종과 세종이 신궁(新宮)의 안뜰에서 대군들과 함께 편을 나누어 격구(擊毬) 시합을 벌렸는데, 이원생도 입시(入侍)하여 말을 달리면서 공을 쳤다. 이해 12월 태상왕의 신궁에 문안하고 헌수(獻壽)를 하였으며, 며칠 후에는 세종이 신궁에 나아가서 음복의 잔치를 베풀 때 입시하였다. 1424년(세종 6) 7월 세종이 편전에서 부원군을 위로하는 연회(宴會)를 열 때 이에 참석하였고, 11월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補), 공녕군(恭寧君)이조(李祖) 등과 함께 궁중 앞뜰 안에서 격구 시합을 벌렸다. 이런 여러 가지 기록에서 의평군은 세종 때 적극적으로 종실의 대군(大君)들과 어울렸던 것을 알 수 있다.

1425년(세종 7) 4월 의평군이원생은 순평군(順平君)이군생, 원윤(元尹) 이의생(李義生), 동첨지돈녕(同僉知敦寧)김세민(金世敏), 동부지돈녕(同副知敦寧)박갱(朴賡) 등과 함께 사패(賜牌)를 위조하여 남의 노비를 빼앗았다고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서, 직첩을 빼앗기고 경기도 해풍(海豊)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포천(抱川)으로 이배(移排)되었다. 1427년(세종 9) 12월 세종이 이원순에게 외방(外方)에서 편한대로 살도록 명하였다가, 1449년(세종 31) 유배에서 풀어주고, 직첩과 과전을 돌려주었다.

인품과 일화

의평군이원순은 정종의 서출이었지만, 15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의 우애도 돈독하여 여러 왕자와 공주가 그를 공경하였고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 지조와 행실이 탁월하였고, 재능과 기예를 잘 활용하였으며, 절차탁마로 학문에 힘써 문장에 통달하였다. 그는 자손들에게 종친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3대 교훈>으로 정해서 반드시 실천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세 가지는 첫째 명리를 구하지 말라[물구명리(勿求名利)]는 것이고, 둘째 시골 농장으로 물러가서 살라[퇴거향장(退去鄕莊)]는 것이고, 셋째 공손하고 겸손하게 자기 분수를 지키라[공검자수(恭儉自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교훈은 의평군파에서 불문(不文) 약정으로 줄곧 지켜서 내려온 것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민간(敏簡)이다. 묘소는 남한산성(南漢山城) 서수어장대(西守禦將臺) 서쪽 아래 태평산대(泰平山臺)에 있었는데, 이 지역이 군용지로 수용되면서, 1974년 경기도 고양시 오금동(梧琴洞) 서산의 우산정(于山正) 이효손(李孝孫)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비문은 후손 이찬기(李鑽基)가 짓고 글씨는 이창열(李昌烈)이 썼다.

부인 철원 최씨(鐵原崔氏)는 최치숭(崔致崇)의 딸인데, 5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우산정(于山正) 이효손(李孝孫)이고, 차남은 재전부정(梓田副正) 이효온(李孝溫)이며, 3남은 아인부정(阿仁副正) 이효영(李孝榮)이고, 4남은 도개부정(道開副正) 이효장(李孝長)이며, 5남은 이성부정(泥城副正) 이효공(李孝恭)이다. 장녀는 박준산(朴峻山)의 처이고, 차녀는 안우신(安友臣)의 처이고, 3녀는 조말견(趙末堅)의 처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충주 지씨 보략(忠州池氏譜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