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문(崔善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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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미상 ~1456년(세조 2) = ? (75세 전후)].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판서(判書)이고, 청백리(淸白吏)에 선록(選錄)되었고, 시호는 문혜(文惠)다. 자는 경부(慶夫), 호는 동대(東臺)다. 본관은 화순(和順), 주거지는 경상도 금릉(金陵: 김천)이다. 아버지는 중부령(中部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로 추증된 최자강(崔自江)이고,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인데, 세종이 열녀문(烈女門)을 세우고 정부인(貞夫人)이라고 봉작하였다. 증조부는 해주목사(海州牧使)최영유(崔永濡)이고, 조부는 병조 참의(參議)최원지(崔元之)이다.

세종 시대의 활동

젊어서 사마시(司馬試)의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으나, 조선 초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벼슬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고향 경상도 금릉의 하로(賀老)에 숨어서 살면서, 성정(誠正)의 학문에 뜻을 기울였는데, 학문의 조예가 날로 깊어지자 스스로 즐거워하며 초야에서 일생을 끝마치고자 하였다. 세종과 문종의 시대를 만나자, 아버지 최자강이 벼슬에 나가라고 강권하고, 또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주고 불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벼슬길에 나갔다.(「최선문 유사」 참고.) 1421년(세종 3)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한 달 동안 세 번 전직될 정도로 세종이 그에게 관심이 많았다. 최선문은 벼슬에 나가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여, 세종을 도와서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였다.

문종~단종 시대의 활동

1450년 2월 문종이 즉위하여 최문선을 이조 판서로 승진시키자, 최선문이 극력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때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인사 행정은 업무가 매우 복잡하므로 그곳에 임명하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문종이 그를 다시 공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최선문에게 자문하였다. 또 문종은 궁중 화가로 하여금 최선문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여 그의 서재에 걸어놓게 하였다. 이것은 나라에서 그를 존대하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그는 문종 시대에 임금을 계도(啓導)하는 경연(經筵)의 책임을 맡아서, 장차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의 3정승을 비롯하여 반대파 대신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그는 크게 낙담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유사」 참고.)

세조 시대의 활동

1455년(세조 1) 조정에서 내자시(內資寺)판사(判事)최선문을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봉하고(『세조실록(世祖實錄)』 참고.) 이듬해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하여 불렀으나, 그는 병을 핑계대고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유사」 참고.)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권을 빼앗은 수양대군에게 벼슬할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심정이 처음에 고려에서 왕권을 빼앗은 조선에 벼슬하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마음과 똑같았다. 1456년(세조 2) 12월 노병으로 금릉 하로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관리들이 애석해 하고 사림(士林)들이 서로 조문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명정(銘旌)에다 공조 판서라고 쓰고, 세조 때 임명된 좌찬성은 쓰지 말도록 유명(遺命)을 남겼다.(「유사」 참고.) 이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세조를 못마땅하게 생각한지를 알 수 있다.

그가 저술한 「성리론(性理論)」과 『문집(文集)』 2 권이 남아 있다.(「유사」 참고.)

성품과 일화

최선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유사」 참고.) 그는 용모가 빼어나게 잘 생기고, 성품이 고결하였다.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용모가 준수하며, 지조가 곧고 행실이 청렴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송죽(松竹)처럼 곧은 지조이고, 수월(水月)처럼 맑은 정신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청렴결백한 한 가지 덕목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그의 인간성을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관청의 일을 할 때 자기 집안의 일처럼 성실하게 일하면서, 털끝만큼도 자기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았다. 임금을 섬길 때 자기 어버이처럼 정성스럽게 섬기면서, 혹시 임금의 나쁜 점을 들추어내는 일은 반드시 피하였다. 그는 학문을 독실하게 연구하고 자기 행실을 연마하여, 도(道)를 닦고 덕(德)을 쌓아서 식견이 넓고 의리에 밝았다.

그는 학문을 연구할 적에는 반드시 성리(性理)의 근원을 궁구하고, 자신을 신칙(申飭)할 적에는 반드시 청렴하고 검소한 덕(德)을 쌓기에 힘썼다. 평시 글을 읽다가, 그 이치를 궁구하려고 반드시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진리를 깨우쳐 터득하여, 그 극치의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그는 유학의 도의(道義)에 관하여 젊은 유학자들과 강론하기를 좋아하여,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 같은 사람들도 모두 최선문의 학식과 고결한 인품을 공경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김천의 남쪽 묵방(墨坊)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부인 김씨(金氏)와 합장하였다. 비문은 없고, 「유사(遺事)」가 남아 있다. 1457년(세조 3) 청백리로 선록되었는데, 이때 나라에서 ‘문혜’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경상도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4 참고.) 그의 향리에 어머니 진주강씨의 열녀문이 세워져 있는데, 그의 아버지 최자강이 죽자 어머니 강씨가 7일 동안 남편의 시신을 안고 울면서 음식을 먹지 않다가 뒤따라서 죽었기 때문이다.

최선문의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부사(府使)김명리(金明理)의 딸이고, 대사성(大司成) 김구용(金九容)의 손녀인데, 5남을 낳았다. 큰아들 최한공(崔漢公)은 문과에 급제하여 풍기 군수(豐基郡守)를 지냈고, 둘째아들 최한후(崔漢侯)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셋째아들 최한백(崔漢伯)은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僉使)·우후(虞候)를 지냈고, 넷째아들 최한번(崔漢藩)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막내아들 최한남(崔漢男)은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남으려고 일부러 과거를 보지 않았다.(「유사」 참고.)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경상북도 김천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청선고(淸選考)』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