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병(朴知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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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1년(선조 34)~1684년(숙종 10) = 84세)]. 조선 중기 인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제용감(濟用監)봉사(奉事)이다. 자는 여장(汝障)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풍천부사(豊川府使)박영신(朴榮臣)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광남군(廣南君)충장공(忠壯公)이광악(李光岳)의 딸이다. 증조부는 부사과(副司果)박호(朴虎)이고 조부는 승지(承旨)박종남(朴宗男)이다.

인조 · 현종 · 숙종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그의 아버지 박영신(朴榮臣)은 풍천성(豊川城)을 사수하다가 적장(賊將) 이수백(李守白)에게 피살되었고, 방어사(防禦使)이중로(李重老) 등 6인도 피살되었다. 이수백은 반란군의 형세가 위축되자 이괄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항복하여 사형을 감면받아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사면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던 박지병은 눈물을 흘리며 맹세코 아버지 박영신을 죽인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다고 분노하며, 은밀히 동생 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과 이중로의 아들 이문웅(李文雄)·이문위(李文偉)들과 함께 이수백을 죽여 아버지의 원한을 씻으려고 수년간에 걸쳐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1634년(인조 12) 3월13일(기해) 마침내 박지병·박지원·박지변 등 5인은 이수백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처벌을 기다렸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극형을 처하려 하였으나, 윤방(尹昉)·오윤겸(吳允謙)·김유(金瑬) 등이 그들의 효성이 지극함과 ‘한유(韓愈)의 복수의(復讐議)’ 중에 ‘장황(張瑝)·성경준(成景雋)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이에 5인 모두 감등되어 의성(義城)으로 귀양갔다가 그 이듬해에 사면되었다.

그는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임명되었었고 제용감(濟用監)봉사(奉事)에 올랐으나 얼마 후에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그 뒤 고령(高齡)으로 품계가 올라 절충장군(折衝將軍)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1684년(숙종 10) 12월 4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지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다. 그는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용맹과 힘이 여덟 마리의 소를 뛰어 넘을 정도였으며 보루의 돌을 모래나 자갈처럼 가볍게 들 정도 였다. 또한 사람됨이 강직하여 세세한 행동에 얽매이지 않았고 잘못된 점을 보았을 경우에는 권귀(權貴)의 사람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면전에서 배척하였다. 도량이 커서 평소 너그럽게 하려고 힘썼으나 대사(大事)를 당하였을 경우에는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리고 과감히 실행하였다. 결국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채 살인죄를 무릅쓰고 손수 원수를 갚은 다음 대궐문 앞에서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효도의 매서운 절개가 일세(一世)를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아버지는 나라에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고 아들은 효성을 드러냄으로써 아울러 영구히 명성을 남기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金村) 선영에 있다. 이의현(李宜顯)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부인 충주최씨(忠州崔氏)는 최광설(崔光渫)의 딸인데, 4남 1녀를 두었다. 1자는 부사박수(朴燧)이고, 2자는 주부(主簿)박희(朴憘)이며, 3자는 현감(縣監)박담(朴燂)이고, 4자는 주부박환(朴渙)이다. 1녀는 변성우(邊聖遇)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