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인(朴齊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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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6년(중종 31)~1618년(광해군 10) = 83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정랑(正郞)이다. 자는 중사(仲思)이고, 호는 황암(篁巖)·정묵(靜黙)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함안(咸安) 출신이다. 아버지는 내금위(內禁衛)박호(朴虎)이고,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는 부사직(副司直)강신범(姜信範)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최영경(崔永慶)·하항(河沆)·김면(金沔)·조종도(趙宗道) 등과 서로 격려하며 면학(勉學)하였다.

선조 · 광해군 시대 활동

1594년(선조 27)에 추천을 받아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임명되었고, 또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9년(선조 32) 봄에 송라 찰방(松羅察訪)이 되었다가 1601년(선조 34)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1602년(선조 35)에 시강원(侍講院) 직강(直講)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 겨울에 왕자사부로 부임하였는데, 이때 선조가 그에게 “왕자에게 먼저 무슨 글을 가르쳐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학(大學)』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대답하자, 선조는 왕자에게 그가 명철한 스승이라 하였다. 1605년(선조 38) 4월에 형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이 해 겨울에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나가 3년간 있다가 1607년(선조 40) 9월에 교체되어 돌아왔다. 1617년(광해군 9)에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18년(광해군 10) 11월 5일 향년 83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작으로 『황암집(篁巖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제인은 타고난 자질이 중후(重厚)하여 어려서부터 이미 장자(長者)다운 기풍이 있었으며 조금 장성하자 글을 읽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또 사람을 대할 적에 온화하였고 성실하였으며 일을 처리할 때 차분하고 신중하였다고도 한다. 늙도록 책상 앞에 앉아 쉬지 않고 글을 보았고 희노(喜怒)의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웃음소리가 문밖에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상도 함안군((咸安郡) 평광리(平廣里)에 있다. 장현광(張顯光)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경상도 함안(咸安)의 도림서원(道林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첫째 부인 재령이씨(載寧李氏)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이침(李琛)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둘째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선공감(繕工監) 역(役)이일민(李逸民)의 딸인데, 박율(朴瑮)을 두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황암집(篁巖集)』
  • 『해사록(海槎錄)』
  • 『학봉전집(鶴峯全集)』
  • 『순암집(順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