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명전(通明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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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침전 영역에 위치하며 대비전에서 주로 사용한 전각.

개설

1483년(성종 14) 수강궁(壽康宮) 자리에 새롭게 창경궁을 조성할 때 경춘전(景春殿)·환경전(歡慶殿)·인양전(仁陽殿)과 함께 침전의 건물로 조성되었다(『성종실록』 15년 2월 11일). 성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인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왕대비로 덕종 비 인수대비(仁粹大妃), 예종 비 인혜대비(仁惠大妃)가 있어 세 명의 대비전을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대비전을 위한 공간으로 창경궁을 조성한 만큼 창경궁은 내전의 영역이 중심이 되었다. 당시 여러 내전 건물이 조성되었으나, 통명전이 창경궁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여 후원에 가까웠다. 통명전(通明殿) 앞에 샘물이 있어 뜰로 넘치기 때문에 이 물을 끌어서 연못을 만들었는데, 서편에 있는 직사각형 연못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1757년(영조 33)에 통명전 곁에 있던 샘을 열천(冽泉)이라 이름 지었다(『영조실록』 33년 5월 29일).

통명전은 건립 초기부터 대비전을 위한 공간이었다. 조선후기 대비전의 위상이 높아지고 진연과 존숭 등의 의례가 자주 일어나면서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의 정전(正殿)으로 위상이 높아진다. 그러나 여러 재해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재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침전 공간이며 남향하였다. 창경궁의 내전에서 으뜸이 되는 전각이며, 주로 대비전에서 거처로 사용하였다. 광해군 이후 대비전에 존호를 올리거나 잔치를 벌일 때 내명부의 연회는 이곳에서 주로 베풀어졌다. 조선후기 대비전이 참여하는 진연과 왕실의 가례는 이곳에서 자주 이루어졌다. 영조가 남긴 통명전에 대한 글에서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하였고, 통명전 중건 상량문에는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라고 적혀 있을 만큼 내전의 의례를 행함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전각이었다.

국상이 발생했을 때 빈전으로 사용된 사례도 나타난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죽자 재궁을 이곳에 모셔 빈전을 설치하고, 왕의 거려(居廬)를 여휘당(麗輝堂)에 설치하도록 하였다(『인종실록』 1년 7월 1일).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仁順王后)가 통명전에서 승하하였고 빈전을 이곳에 설치하였다(『선조실록』 8년 1월 2일). 1757년(영조 33)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빈전을 통명전에 설치하였고, 이때 왕의 거려로는 환경전 남행각에 위치한 공묵합(恭默閤)을 사용하였다. 1752년(영조 28)에 의소세손(懿昭世孫)이 통명전에서 죽었다(『영조실록』 28년 3월 5일).

1609년(광해군 1)에 대비가 머물 수 있도록 새롭게 단장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대비전에서 주관하는 대규모 잔치인 진풍정(進豊呈)이 통명전에서 이루어졌다. 효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는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존호를 올리는 의례도 이곳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통명전에서 좋지 않은 물건이 나오면서 거처를 수정당으로 옮겼다가 1657년(효종 8)에는 대비를 위해 만수전(萬壽殿)을 새롭게 짓고 거처를 만수전으로 옮겼다. 현종 연간에는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거처로 삼았으며, 숙종이 즉위한 후 현종 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이곳에서 머물렀다. 1687년(숙종 13)까지 인조 비 장렬왕후가 왕실의 가장 웃어른으로 만수전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수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통명전으로 이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진연을 베풀 때 인정전(仁政殿)에서 연화를 베풀고 내연(內宴)은 통명전에서 행했다.

1726년(영조 2) 경종의 상례를 마치고 왕비 책봉과 함께 대왕대비·왕대비의 존호를 올릴 때 통명전에서 거행하였다. 1676년(숙종 2)에는 존숭은 통명전에서 거행하고 왕비 책봉은 희정당(熙政堂)에서 행했다. 1722년(경종 2) 대비께 존호를 올리는 것과 왕비의 책봉을 모두 통명전에서 하였다. 이에 따라 1726년의 존숭은 통명전에서 거행하고 왕비 책봉은 양화당(養和堂)에서 거행하도록 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영조가 50세가 되어 잔치를 베풀었는데, 왕이 주관하는 연회는 영화당(映花堂)에서 하고 자전의 연회는 통명전에서 했다. 1747년(영조 23)에 대왕대비의 존호를 올릴 때 통명전에서 의례를 행했으며 왕이 친히 책보를 올렸다. 1753년(영조 29)에 다시 이곳에서 인원왕후의 존호를 영복(永福)이라 올리고 책보를 바쳤다.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통명전은 진연과 진찬의 장소였으며,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이 이곳에서 이어졌다. 이는 영조 연간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가 통명전에서 행한 의식을 기준으로 정리·수록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조속오례의』「왕비께 진연하는 의식」은 1706년(숙종 32) 통명전에서 행한 절차를 기준으로 정리·수록되었다. 「대왕대비께 진연하는 의식」 또한 1686년(숙종 12) 장렬왕후의 62세에 통명전에서 진연을 행한 것과 1728년(영조 4) 인원왕후에게 통명전에서 진연한 의식을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이후 통명전은 대비전에 진연하는 정전으로 인식되었다.

통명전에서 가례와 관련된 의례를 행한 사례는 1727년(영조 3) 왕세자의 친영을 어의동본궁(於義洞本宮)에서 행하고 동뢰연을 통명전에서 한 데서 나타난다. 1837년(헌종 3)에는 통명전에서 삼간택이 행해졌다.

변천 및 현황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과 함께 건립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이 소실되면서 통명전도 불에 탔다. 이에 1633년(인조 11)에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창경궁의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였는데, 인경궁의 청와전(靑瓦殿)을 옮겨 통명전을 중수하였다. 이때 통명전의 규모는 정면 5칸이며 사면에 퇴를 갖춘 총 28칸 규모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1790년(정조 14) 통명전에서 불이 나 다시 소실되었고 「동궐도(東闕圖)」가 작성되던 당시에는 통명전이 소실된 상황이어서 월대와 초석만 묘사되었다. 1830년(순조 30) 환경전에서 불이 나면서 창경궁의 내전이 모두 소실되었고, 3년이 지난 1833년(순조 33)에 창경궁의 내전을 재건하면서 통명전도 다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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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몸체에 사면으로 툇간이 구성되어 총 28칸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를 형성하지 않고 무량각으로 조성한 특징이 보인다. 정면에는 넓은 월대를 갖추고 있으며 건물의 서쪽에는 네모난 모양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궁궐지(宮闕志)』
  • 문화재청, 『창경궁 통명전: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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