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여(姜善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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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4년(선조7)~1647년(인조25) = 74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적이(積而),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돈령부(敦寧府)첨정(僉正)강수곤(姜秀崐)의 아들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2)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를 거쳐 공조·예조·병조의 좌랑(佐郞)을 지냈는데, 그 뒤 광해군 후반기 7년 동안(1615~1622) 병조를 떠나지 않고 군사 실무를 보다가,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서인 세력과 가까웠는데, 그때 병조의 실무자로서 거사를 알고도 군사를 동원하여 막지 않고 방관한 것으로 보인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연평군(延平君)이귀(李貴)가 발탁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본인이 굳이 사양하고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형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 사도시(司䆃寺)정(正), 군자감(軍資監)정(正)으로 옮겼다. 당시 국제 정세는 1626년 청(淸)나라 태조(太祖)누르하치가 죽고 태종(太宗)홍타지가 즉위하였으며, 1627년 명(明)나라 희종(熹宗)이 죽고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즉위하였는데, 반정(反正) 세력은 친명(親明) 정책을 취하고 청나라와 관계를 끊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강선여는 명나라 희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진향사(進香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뱃길을 이용하여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육로는 청나라에 의하여 막혔기 때문이다. 좌통례(左通禮)와 우통례(右通禮)를 거쳐서, 1633년(인조11)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형조참의로 전임되었는데, 그때 법의 집행을 둘러싸고 반정 세력과 충돌하여, 마침내 탄핵(彈刻)을 받아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인조를 모시고 청태종홍타지의 오랑캐 군사와 용감하게 싸웠다. 호란이 끝난 다음에 인조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중추부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돈령부로 전직하여,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서 충청도 청양(靑陽)에서 은거하다가 1647년(인조25)에 죽으니, 향년 74세였다.

묘소와 사평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해천(蟹川)의 언덕에 있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강선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평이 남아 있다. 벼슬에 나아가서 일을 처리할 때에 한결같이 공정하고 정직하며, 성품도 준엄하고 결백하여 남을 용서하는 일이 적었다. 이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였지만, 세인(世人)의 환심을 사지도 못하였다. 또 사림파(士林派)의 서인(西人)에 속하였지만, 인조의 반정공신들과 대립하여 그 지위가 그다지 높지 못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