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光化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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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남쪽의 정문.

개설

광화문은 백악산을 뒤로하고 서 있는 육조거리의 중심이었고, 법궁의 정문으로서 조선왕조와 궁궐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건물이다. 궁성 남문인 광화문의 이름은 1426년(세종 8) 세종이 집현전(集賢殿)에 명하여 지어졌다(『세종실록』 8년 10월 26일). ‘광화(光化)’란 천자나 군주에 의한 덕화(德化), 즉 국왕의 통치에서 우러나오는 빛으로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이다.

위치 및 용도

광화문 앞 좌우는 중요 관청이 들어선 육조거리였으며 현재는 세종로이다. 광화문의 문루는 태종대 창건 당시에는 상·하층이 있었는데, 다락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려 신하들이 조회 시간을 엄수하도록 했다. 광화문은 백관들이 출입하던 문이기도 했다. 1867년(고종 4)에는 대궐문을 출입하는 규례를 정했는데 승지(承旨)영추문(迎秋門), 백관(百官)들은 광화문의 동쪽과 서쪽 협문으로 출입하되 문관은 동쪽 협문으로, 무관은 서쪽 협문으로 출입하였으며, 각 관서의 당직 관원 이하는 편의대로 하도록 했다(『고종실록』 4년 11월 14일).

또한 광화문은 궁궐의 입구라는 점에서 각종 의례의 중요 장소가 되었는데, 왕이 궐외로 나아갈 때 광화문에서 여(輿)로 갈아탔으며, 궐내에서 행해지는 문·무과 시험 때에는 응시자들이 신호에 따라 광화문 앞에 모여 정렬했다가 궐 안으로 들어갔다. 중국의 사신이 올 때에는 광화문 앞에 채붕(綵棚)을 설치하여 잡희(雜戲)를 베풀어 영접했으며, 칙서가 올 때에도 광화문에서 맞이했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은 도성 내의 다른 궁궐과 달리 궁성을 갖추고 있으며 궁성의 네 면에 각각 성문과 문루를 두고, 궁성의 남쪽 양끝 모서리에는 각루(角樓)를 두었다.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할 때에는 궁성 없이 내전과 외전, 궐내의 시설과 오문(午門), 행각만을 지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1398년(태조 7)에 궁성을 쌓기 시작하여 1399년(정종 1)에 완성했는데, 궁성의 남문인 광화문은 1397년(태조 6) 7월에 먼저 완성되었다. 창건 당시 문루는 3칸으로 상하층이 있었으며 석축에도 3개의 홍예가 있었다. 처음에는 궁성의 동·서·남쪽 삼면에만 문을 세웠고 궁성의 정면 동쪽과 서쪽 모서리에는 석축 위에 각루인 동십자각(東十字閣)과 서십자각을 세워 궁성의 망루로 삼았다. 동·서 각루는 세종대에 기울어져 위태하고 쓸모없다 하여 철거했으나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세웠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조선후기 경복궁 중건 시 궁성과 함께 제일 먼저 공사를 시작하여 1865년(고종 2) 10월 11일에 상량했다. 이때 지은 광화문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1926년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6·25전쟁 시에 폭격으로 문루가 소실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실측한 도면을 토대로 1968년 경복궁의 남쪽 궁장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으나 그 위치는 경복궁 배치 축에서 동쪽으로 약간 틀어지고 북쪽으로 후퇴한 곳이었다. 2010년에 이것을 헐고 원래의 위치를 찾아 목조로 복원했다.

형태

광화문은 다른 궁문과 달리 출입을 위한 홍예를 중앙과 좌우 3곳에 두어 왕과 신하가 출입하는 것을 구분했다. 여장은 벽돌에 무늬를 넣어 장식했고, 홍예의 이맛돌에는 귀면을 조각했다. 육축 위의 문루는 외2출목, 내3출목의 다포 형식이다. 정면의 폭이 전체 24m가량 되는데, 주칸은 3칸으로 어칸의 폭이 8.5m(27자)에 달한다. 이렇게 기둥 간격이 넓으면 기둥 상부에 얹은 가로 부재가 아래로 처질 수밖에 없는데, 이 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기둥 양 옆에 1m 정도 간격을 두고 작은 기둥을 하나씩 세워 상부의 가로부재[창방]를 지탱했다. 광화문은 도성의 남대문인 숭례문과 규모가 거의 비슷한데, 숭례문은 도리칸이 5칸이어서 어칸의 폭이 훨씬 좁다.

고종대에는 광화문의 동쪽과 서쪽 궁성 모서리에 십자각을 세웠다. 그중에서 서십자각은 일제 강점기에 경복궁내에 각종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이용객의 편리를 위해 전찻길을 내기 위해 헐렸다. 현재 남아 있는 동십자각은 고종 초기 경복궁 중건 당시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평면에 내부 고주칸에는 창호를 달았다. 육축 위에는 전돌로 여장을 쌓았으며 남쪽과 동쪽에 연잎을 조각한 석루조가 2조씩 있고 여장 하부의 석축 상단에는 당초문과 앙련, 복련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모임지붕에 절병통을 얹었고 기둥과 창방에는 낙양을 달았으며 공포는 이익공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서 도성 내에 종(鐘)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이 종을 쳐서 알렸다고 보았는데, 종각, 종현(鍾峴)과 함께 도성 내 종이 설치된 곳이 바로 광화문이었다. 광화문에 처음 종을 달았던 것은 1412년(태종 12)이었으며, 이때 변계량(卞季良)이 종명(鐘銘)을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광화문과 종루의 종은 망가졌으며, 1451년(세조 7)에 만들어 흥인문(興仁門)에 달았던 종을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에 달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誌)』
  • 『궁궐지(宮闕志)』
  • 『임하필기(林下筆記)』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1, 경복궁』, 수류산방,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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