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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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에서, 종성은 글자를 따로 만들지 않고 초성으로 만든 글자를 다시 사용하도록 한 원칙.

개설

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은 종성자의 제자(制字)와 관련한 원리로, 종성은 따로 글자를 만들지 않고 초성 글자를 이용해 함께 표기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이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의 문헌에는 현대 국어의 정서법과 같이 모든 초성을 종성으로 사용하였고, 이를 근거로 종성부용초성이 초성 글자 모두를 종성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라는 식으로 확대 해석된 예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문헌에서는 『훈민정음』의 종성해(終聲解)에서 언급한 ‘팔자가족용(八字可足用)’, 즉 종성에는 8개의 초성만 사용해도 충분하다는 원리가 지켜졌다.

내용 및 특징

『훈민정음』「예의(例義)」에서 언급한 종성부용초성은, 훈민정음 창제자들이 중국 성운학(聲韻學)의 이론을 응용하였으나 실제 우리말 음절을 구분할 때는 독창적으로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는 삼분법을 취했음을 보여 준다(『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또한 음절 내의 위치는 다르지만 초성과 종성에 서로 같은 자모(字母), 즉 알파벳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창제자들이 초성과 종성이 자음(子音)이라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예의」에서는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과 목적을 비롯해 새로 만든 글자의 속성만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으므로, 종성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종성해(終聲解)에서 설정한 팔종성가족용법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종성과 관련해 설정한 첫째 원칙은, 종성은 글자를 따로 만들지 않고 이미 만든 초성 글자를 활용하여 표기한다는 것, 즉 종성부용초성의 원칙이다. 둘째 원칙은 모든 초성을 다 쓰는 것이 아니라, 8개의 자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팔종성가족용법(八終聲可足用法)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이 순차적으로 적용되어야 훈민정음의 종성 즉 받침 표기를 설명할 수 있다.

해례본(解例本) 『훈민정음』에는 종성부용초성이란 용어가 두 군데에서 등장한다. 우선 『세종실록』에도 포함되어 있는 「예의」 부분과 「제자해(制字解)」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제자해」는 한글이 만들어진 과정과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예의」에서는 초성과 중성의 모양과 음가(音價)를 보여 주는데, "‘ㄱ’은 어금닛소리이며, ‘군(君)’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다[ㄱ牙音, 如君字初發聲]"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초성과 중성을 설명한 뒤, 그 말미에 ‘종성부용초성’이라고만 언급하였다. 따라서 종성은 초성과 만든 방법, 음가, 발음 위치 등이 완벽하게 일치하므로 재론할 이유가 없다는 서술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제자해」에서는 「예의」보다는 상세하게, 일원(一元)과 건곤(乾坤), 음양(陰陽)의 원리를 바탕으로 사계(四季)의 순환을 들어 초성과 종성이 서로 함께 쓰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결과적으로 종성부용초성이란 자음을 종성에서 사용하는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초성과 종성은 음절 내의 위치를 구분하는 술어일 뿐이며 두 자리에 쓰이는 음은 모두 자음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즉, 초성과 종성은 음절 내의 위치를 구분하는 술어일 뿐이며, 두 자리에 쓰이는 음은 모두 자음이라는 동질성 위에서 일치한다는 설명을 종성부용초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종이 정한 초성은 ‘ㄱ, ㄴ, ㅁ, ㅅ, ㅇ, ㅋ, ㄷ, ㅌ, ㅂ, ㅍ, ㅈ, ㅊ, ㆆ, ㅎ, ㆁ, ㄹ, ㅿ’ 등 모두 17자로, 훈민정음의 자음 체계 중에서 전탁(全濁)에 해당하는 ‘ㄲ, ㄸ, ㅃ, ㅉ, ㅆ, ㆅ’ 등 6자가 빠진 것이다. 전탁에 해당하는 글자들은 기본자와 기본자의 결합에 의해 생긴 2차 생성 글자라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해례본 『훈민정음』 종성해에는,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의 8자면 종성으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즉 모든 초성자를 다 종성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급한 8자만으로도 종성을 표시하기에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오늘날의 배꽃에 해당하는 ‘곶’은 ‘곳’으로, 여우 가죽을 뜻하는 ‘의 갗’은 ‘엿의 갓’으로 쓸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훈민정음 창제자들이 형태 음소적 표기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지만, 음소적 표기의 상대적 편의성 또한 인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실용적 편의에 따라 음소적 표기를 선택했음을 보여 준다. 또 한편으로는 자음의 음절 말 내파(內破)와 중화(中和) 현상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종성해에서는 종성에 사용되는 자음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최대한 현실 언어 발음에 근접한 표기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1527년(중종 22)에 간행된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 범례(凡例)에서는 초성종성통용팔자(初聲終聲通用八字) 즉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이는 여덟 글자로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을 제시하였다. 이는 자음의 배열 순서에만 차이가 있을 뿐 『훈민정음』 종성해의 설명과 일치한다. 이를 통해 팔종성법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우리말 받침 정서법의 유일한 규칙으로 지켜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40년에 해례본 『훈민정음』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세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나 기타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을 통해 당시의 이론과 원칙을 추론해야 했으므로, 종성부용초성이라는 설명에 의거해 훈민정음의 정서법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언해본들은 모두 『훈민정음』의 「예의」 부분만을 언해한 것이기 때문에, 종성과 관련된 정보는 고작 ‘내즁소리 다시 첫소리 니라[終聲復用初聲]’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모든 초성 글자가 종성으로도 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 ‘곶, 깊고, 좇거늘, 낱, 붚, 앒’ 따위의 표기가 나타나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종성부용초성의 표기는 당시의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그 이후 모든 문헌에서 팔종성법이 지켜졌다.

변천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새로운 맞춤법이 등장하지 않은 영향도 있었겠지만, 조선시대에는 맞춤법이나 종성 표기에서 별다른 변화 없이 팔종성가족용 즉 음소적 표기 원칙이 지켜졌다. 15세기에는 ‘ㅿ’이 종성 자리에 쓰이는 예가 자주 나타나기도 했지만, 16세기 초에 ‘ㅿ’이 소실되면서 이러한 현상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말 이후에야 우리말 표기에 형태 음소적 원리를 적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주시경(周時經)과 지석영(池錫永) 등이 중심이 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의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에서, 종성부용초성의 원칙을 적용하여 ‘ㄷ, ㅈ, ㅊ, ㅋ, ㅌ, ㅍ, ㅎ’ 등의 초성자를 모두 종성자로 쓸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 뒤 오늘날까지 이 원칙은 우리말 표기에 적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 『훈민정음(訓民正音)』
  • 『훈몽자회(訓蒙字會)』
  • 이기문, 『國語史槪說』(新訂版), 태학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