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증(趙喆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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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27년(순조 27)~1868년(고종 5) = 42세]. 조선철종(哲宗)~고종(高宗) 때의 문신으로 천주교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치양(稚壤)이고,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평창군수(平昌郡守)를 역임한 조능하(趙能夏)이며, 어머니는 이세악(李世岳)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조병겸(趙秉謙)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조기영(趙基永)이다.

철종~고종 시대 활동

1850년(철종 1)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거쳐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고종실록(高宗實錄)』 4년 4월 19일),[『방목(榜目)』]

조철증은 천주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서울 재동(齋洞)에 거주하며 천주교 신자였던 지자익(池子益) 등과 교류한 것을 분명하다. 1868년(고종 5) 천주교인으로 체포된 장치선(張致善)의 진술에 따르면, 조철증은 천주교인들과 오랜 친분관계를 맺었으며 1866년(고종 3) 조선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발생하자, 리델(Ridel) 신부를 조선으로부터 탈출시키려는 지자익의 계획에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고종실록(高宗實錄)』 5년 4월 19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5년 4월 19일, 20일]

이 같은 장치선의 진술로 인하여 조철증에 대해 체포령이 떨어졌는데, 당시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이었던 그의 조카 조유선(趙猷善)이 4월 22일 당시 단양에 거주 중이던 조철증에게 미리 체포 소식을 전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조철증은 곧바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고종실록』 5년 4월 20일),(『고종실록』 5년 4월 20일),(『고종실록』5년 4월 20일),(『고종실록』 5년 4월 26일) 당시 조철증의 나이 42세였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문과방목(文科榜目)』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