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찬(黃耆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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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무신(武臣).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지냈고, 자는 훈옹(勳翁)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군(護軍)황석경(黃碩卿)이고, 어머니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우원로(禹元老)의 딸이다. 숙부 황준경(黃俊卿)에게 양자로 갔다. 참찬(參贊)상산군(商山君)황효원(黃孝源)의 손자이고, 대사헌(大司憲)황우한(黃佑漢)의 조부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3년(중종 8) 식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하급 무사 관직을 거쳐 현감(縣監)과 군수(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531년(중종 26)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에 임명되었다가, 1532년(중종 27) 예빈시(禮賓寺)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1543년(중종 38) 함경도 상토 첨사(上土僉使)에 임명되었는데,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함경도 상토 첨사황기찬은 별로 현능(賢能)하지도 못하고, 활 쏘고 말 타는 무예의 재주도 없으므로,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에 맞지 않습니다.” 하니, 중종이 대답하기를, “황기찬은 당상관(堂上官)의 관직인 부사(府使)의 후보자[望]에 오른 것이 지금 뿐만이 아니라 전에도 여러 차례 주의(注擬)되었다. 다른 사람을 바꾸더라도 인물이 모자라므로 반드시 직질(職秩)을 높여서 서용(敍用)해야 할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사헌부에서 다시 아뢰자, 중종이 바꾸어 임명하라고 허락하여, 황기찬은 함경도 상토 첨사로 부임하지 않았다.(『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38년 12월 21일 · "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38년 12월 22일)

1535년(중종 30) 중종이 개풍(開豊)에 있는 제릉(齊陵)을 배알(拜謁)하고 부근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서 과거 시험을 보였다. 제릉은 태조의 제 1왕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이다. 당시 강화부사이던 황기찬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귀령(李龜齡) · 광주목사(廣州牧使)박륙(朴稑)과 함께 시관(試官)으로 참여하였다.[『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 권4]

성품과 일화

황기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실록이나 문집 등에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서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중종실록』에, 그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에서는 법제가 있어, 어버이의 연세가 이미 70세가 늙었다고 정장(呈狀)하면, 먼 변방(邊方)의 수령관 임명을 취소하고, 고향에 가까운 고을에 옮겨서 임명하여, 그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도록 조처하여 주었다. 1531년(중종 26) 황기찬은 함경도 경흥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정장하지 않고, 무사로서 당시 관리들이 모두 부임하기를 꺼려하였던 함경도 관방 지방에 부임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아보고자 하였다.

다음해인 1532년(중종 27) 황기찬이 예빈시 첨정으로 천거되었을 때 비로소 어버이의 연세가 70세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때 사간원에서 탄핵하기를, “황기찬은 경흥부사로 부임할 때에는 갑자기 3품으로 승급(陞級)하여 부사(府使)가 되는 것이므로, 그 직책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여, 어버이가 늙었다는 것을 숨기고 정장하지 않았으며, 또 자기가 부임한 뒤에 어버이가 70세라는 것이 밝혀지면, 법으로 당연히 체직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계산하였으니, 그 계략이 지극히 간교합니다. 지금 급급하게 그를 서용한다면, 그의 간교한 계략이 말려들어가는 것이니, 빨리 그를 바꾸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중종이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중종실록』 중종 27년 5월 17일) 그러나 결국 황기찬은 예빈시 첨정에 임명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정직한 충정(忠情)을 알아주었다고 하겠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의 선영(先塋)에 있다.

자녀는 3자를 두었는데, 장남 황세은(黃世慇)은 판관(判官)을 지냈고, 차남 황세민(黃世愍)은 유일(遺逸)로서 홍산(鴻山)에 거주하였고, 3남 황세근(黃世懃)은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을 지냈다. 그의 손자 황우한은 선조 때 도승지(都承旨) · 대사헌을 지냈고, 그의 현손 황징(黃徵)은 숙종 때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무과방목(武科榜目)』
  • 『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