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유(權尙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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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6년(효종7)∼1724년(경종4) = 69세]. 조선 후기 숙종 때 활동한 유학자. 자는 계문(季文) · 유도(有道)이고, 호는 구계(癯溪)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주거지는 청풍(淸風)이다. 사헌부 집의(執義)권격(權格)의 아들이며 영의정권상하(權尙夏)의 동생이고, 이초로(李楚老)의 외손자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94년(숙종20) 알성 문과에 합격하여, 시강원 설서(說書)를 거쳐서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승진하였다.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수찬(修撰) · 교리(校理)가 되었고, 병조 · 이조의 좌랑과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1704년(숙종30)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다음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조 · 예조 · 공조의 3조 참의(參議)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 개성유수(開城留守),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1709년(숙종35) 대사성(大司成)으로 전직되었다가, 1710년(숙종36)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전라도순무사(全羅道巡撫使)로 나갔다가, 이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의 5조 참판을 거쳐서, 한성좌윤(漢城左尹),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1714년(숙종40)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1715년(숙종41) 형조 판서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호조 판서를 거쳐 1718년(숙종44)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다시 호조와 예조의 판서를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옮겼다가, 1721년(경종1)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노론의 성리학

그가 일찍이 홍문관 응교(應敎)에 있을 때 숙종에게 아뢰기를, “명(明)나라 세종(世宗)이 육상산(陸象山: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을 금지한 것은 잘한 일이었으나, 임금이 몸소 교유(敎諭)한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진헌장(陳獻章)과 왕수인(王守仁)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하였다. 이어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과 육구연(陸九淵)의 양명학(陽明學)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 다음에, 당시 윤휴(尹鑴)가 주자를 비방하고 모독한 여파가 박세당(朴世堂)에게 미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를 배척하고 있다고 극력 주장하였다. 숙종은 박세당의 책을 즉시 들여오라고 하여 이를 보고 불태워버리고, 유신들로 하여금 박세당의 주장에 반박하는 변설문(辨說文)을 짓게 하였다. 이 때 권상유가 조목조목 논박하고 구절마다 분석하여 이론의 시비가 명백하게 드러나니, 김창협(金昌協)이 그의 학식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1703년(숙종29) 권상유 등이 『사변록』을 논박하는 책을 완성하였다. 그는 성리학의 여러 학설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논어』와 『주역』에 통달하였다. 그는 형인 권상하와 함께 송시열의 수제자로서 노론(老論)의 성리학에 대한 정통성을 확립하고, 남인(南人)을 배척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 결과 경종(景宗) 초기 <신임사화(辛壬士禍: 壬寅獄)>가 일어났을 때 탄핵을 받아 삭직당하고 고향 청풍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724년(경종4) 4월에 돌아갔는데, 향년이 69세였다.

사후 추모와 묘소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묘소는 처음에 충청도 청풍의 선영에 있었으나, 나중에 길지(吉地)라고 알려진 전라도 금산(錦山)의 두곡(杜谷)으로 옮겼다.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성재유고(醒齋遺稿)』
  • 『한수재집(寒水齋集)』
  • 『서파집(西坡集)』
  • 『수곡집(睡谷集)』
  • 『간재집(艮齋集)』
  • 『옥오재집(玉吾齋集)』
  • 『죽천집(竹泉集)』
  • 『한포재집(寒圃齋集)』
  • 『도곡집(陶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