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후(高用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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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7년(선조10)~1652년(효종3) = 7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서석(瑞石)이고,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의병장(義兵長) 고경명(高敬命)의 막내 아들이고, 청릉군(靑陵君)이인기(李麟奇)의 사위이다.

선조~광해군 시대의 활동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서 아버지와 두 형이 의병(義兵)으로 금산(錦山)과 진주(晉州)의 싸움에서 전사하는 화(禍)를 당하자 한동안 방황하였으나 뜻을 가다듬고 학문에 전념하여 1605년(선조38)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다음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607년(선조40) 예조좌랑에 임명되어, 병조좌랑·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그를 충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우대하여, 안마(鞍馬) 한 필을 하사하고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1615년(광해군7) 독서당(讀書堂)에 뽑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광해군이 장차 문한(文翰)의 일을 맡기려고 하였으나, 성격이 호탕하여 처신하는 데 간혹 실수를 하여 자주 비난을 받았으므로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지 못하고 남원부사(南原府使), 고성군수(固城郡守) 등 주부(州府)의 수령(守令)을 지내는 데 그쳤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광해군 때 대북파(大北派)와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수난을 당하였다. 1624년(인조2) 고성군수로 있을 때 사헌부에서 그가 이름 있는 충신의 아들로서 광해군 시절 권세 있는 집에 드나들었다고 파직하기를 청하니, 인조가 그를 삭탈관직(削奪官職)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파직되어 향리 전라도 광주(光州)로 돌아가서 15년 동안 지냈다. 1631년(인조9) 동지사(冬至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중국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지은 시어(詩語)가 불충(不忠)하다고 지적당하여, 뜻하지 않게 사형을 당할 뻔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충신의 아들이라고 하여 특별히 사형을 면제하여 영덕(盈德)으로 유배시켰다. 유배 중 중국 북경으로 사신 갔을 때 보삼(補蔘)을 마음대로 사용했던 일이 발각되어, 다시 국문(鞫問)을 받고 진주로 유배되었다. 얼마 뒤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향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술과 시를 벗하여 살다가 1652년(효종3) 나이 76세로 생애를 마쳤다.

성품과 문장

고용후의 문장은 아버지 고경명처럼 뛰어났는데, 그가 지은 시(詩)와 문(文)은 대단한 풍류와 운치가 있었다. 그가 술기운에 갑자기 읊다가 물의를 일으킨 시어(詩語)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불충(不忠)하기보다 오히려 충신의 집안에서 물려준 충절을 풍류로 읊으면서 운치를 높이려고 ‘충정(忠貞)’ 두 글자를 지나치게 달리 표현한 것에 지니지 않았다. 그가 남긴 글은 흩어져서 많지 않으나, 『청사집(晴沙集)』과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朝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사집(晴沙集)』
  • 『정기록(正氣錄)』
  • 『계곡집(谿谷集)』
  • 『고봉집(高峯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