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烈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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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위해 정절을 지킨 여자.

개설

열녀(烈女)는 남편이 죽은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守節)하거나, 혹은 위독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이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는 등의 열행(烈行)을 행한 여성을 말한다. 또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남편이 죽은 뒤 따라 죽은 여성도 열녀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열녀에게 정문(旌門)을 세워 주거나,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실질적인 혜택을 주어 그 열행을 포상하였다. 그런데 열행은 시대에 따라 변하여, 조선시대 초기에는 개가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수절하는 열녀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순절하는 열녀들이 늘어났다.

내용 및 특징

남편을 위해 정절을 지킨 열녀는 조선시대 이전에도 존재했다. 고려시대 말기에 사대부들이 여성의 열(烈)이나 절의(節義)를 표창하기 위해 지은 전(傳)이나, 『고려사(高麗史)』 및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수록된 열녀 기록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열행을 본격적으로 표창하고 권장한 것은 조선시대 이후의 일이다.

유교 이념을 근간으로 성립된 조선 왕조는 유교 국가로의 재편을 위해 유교의 핵심 윤리인 충, 효, 열을 실천한 사람들에게 충신, 효자, 열녀라는 칭호를 내리고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정문을 세워 주고, 세금과 요역을 감면하거나 면제해 주었으며, 당사자나 그 자손을 서용(敍用)하였다. 예를 들어, 1420년(세종 2)에 진주의 아전 정습(鄭習)은 열녀의 아들이라고 해서 아전 구실을 면제받고 잡과를 볼 수 있었다(『세종실록』 2년 5월 7일). 반면 양반 여성이 정절을 지키지 않고 재가할 경우, 그 아들은 ‘재가녀자손금고법’에 따라 청요직(淸要職)에 나아가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이 법은 조선 성종대에 양반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양반 가문 여성의 재가를 법적으로 금지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조선 왕조는 백성들을 유교적으로 교화시켜 충, 효, 열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삼강행실도』의 반포와 언해는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세종대에 편찬·간행된 『삼강행실도』는 교육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81년(성종 12)에 성종은 사족의 부녀자들 가운데 더러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있어 염려스럽다며, 한양과 지방의 부녀자들에게 『삼강행실열녀도』를 강습할 절목을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예조에서는 한양의 경우 종친과 벌열뿐 아니라 한미한 가문도 모두 모여서 거주하므로 가장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고, 지방의 경우 시골에 흩어져 혹 가르칠 사람이 없으면 촌로 가운데서 명망 있는 사람을 골라 두루 가르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 12년 4월 21일). 이렇게 해서 열 관념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열녀에 대한 포상은 조선 태종대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주로 남편이 죽은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여성을 열녀로 인식하였다. 그에 따라 남편이 죽은 뒤 개가를 거부하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시부모가 죽은 뒤에는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명절과 기일에 정성껏 제사를 지내는 것을 열행으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열행의 강도는 점차 심해져서, 손가락을 자르거나 다리 살을 베어 먹이는 등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남편이 죽은 뒤 목을 매어 따라 죽는 경우도 생겨났다. 1475년(성종 6)에 호군(護軍)박종(朴琮)의 부인 김씨가 남편이 죽은 뒤 목을 매어 죽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문을 내리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성종실록』 6년 3월 17일). 이처럼 열행의 강도가 점점 세진 결과, 1505년(연산군 11)부터는 삼년상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만으로는 열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4일).

이후 16세기와 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전란의 와중에 외적의 성적 위협에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은 여성들이 생겨나고, 또 포로로 잡혀갔던 여성들이 돌아오기도 하면서 여성의 정절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었다. 그 결과 외적의 침입이라는 직접적인 위기 상황에서 그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 자결한 여성들이 주로 열녀로 인정을 받았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들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열녀 정려를 받는 사람들 중에는 순절한 여성들이 많았다. 정조와 순조대에는 열녀의 수가 급증하였는데, 특히 순조대에는 예조에서 보고해 올리는 열녀의 수가 수십명에 이르러 구체적인 열행은 예시되지 않고 지역과 이름만 제시될 정도였다. 조선시대 후기에 열녀전이 많이 창작된 것은 열녀의 수가 급증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박지원과 정약용 같은 학자들은 열녀의 수가 급증하는 현상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지만, 열녀는 1900년이 넘어서까지도 생겨났다.

양반 여성은 물론이고 여종이나 기녀 등 천민 여성까지도 수절 또는 순절을 통해 열녀가 되었다. 왕족으로는 정조의 누이인 화순귀주(和順貴主)가 유일하게 순절하여 정려가 내려졌다(『정조실록』 7년 2월 6일).

한편, 열녀로 공인되는 과정이 언제나 공정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6년(순종 2)에 봉상사 부제조이필화(李苾和)는 상소를 올려, 장례원(掌禮院)에서 정려를 세워 줄 때 관례로 돈을 받는 일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열녀로 인정받는 것이 집안의 명예를 높이고 실질적인 혜택을 얻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을 수 있다. 1909년(순종 2)에 순종이 마산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관리, 관리 집안의 선비, 효자와 함께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열녀가 참석한 예는(『순종실록』 2년 1월 10일) 열녀가 일종의 명예를 나타내는 지표였음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강명관, 『열녀의 탄생』, 돌베개, 2009.
  • 이혜순·김경미, 『한국의 열녀전』, 월인, 2002.
  • 박주, 「조선시대 정표 정책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이경하, 「『삼강행실도』의 폭력성 재고-열녀편을 중심으로-」, 『고전문학연구』35, 2009.
  • 이혜순, 「열녀상의 전통과 변모-『삼강행실도』에서 조선후기 『열녀전』까지-」, 『진단학보』85, 1998.
  • 홍인숙, 「봉건가부장제의 여성 재현:조선후기 열녀전」, 『여성문학연구』5, 2001.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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