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역변통(良役變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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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역법 이전까지 양역의 구조적 개편으로 양역의 폐단을 제거하려 한 움직임.

개설

‘변통’이란 궁(窮)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주역』의 구절에서 온 용어였다. 어떤 제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대책을 마련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양역변통이란 양역의 운영을 임시적으로 개선하려는 방편이 아니라 양역제의 모순을 뿌리 뽑으려는 움직임을 말하였다. 크게 보면 양인 장정의 인신에 세를 부과하는 양역제 자체를 부정하는 대변통(大變通)과 단순히 군역 부담을 줄여서 그 폐단을 완화하려는 소변통(小變通)이 있었다. 전자의 예로는 호포(戶布)·구전(舊傳)·유포(遊布)·결포(結布) 등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감필(減疋)이 대표적이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직전까지 조선전기의 군총은 대략 400,000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조선후기 임진왜란을 겪은 후 인구가 크게 줄어 그 숫자는 채워질 수 없었다. 중앙정부는 예전 군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호패법 등을 시행하여 군역을 부과할 양인 장정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인조 초에 시행한 호패법은 호적에서 남성 장정의 수를 1,030,000명에서 2,260,000명으로 크게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임진왜란 이전 군제[舊軍制]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1648년(인조 26)에 조사한 바로는 400,000명 가운데 150,000명만 실제 숫자였고 나머지 250,000명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주요한 이유는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인 사병(私兵)이 반정 후에도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오군영을 형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이전 군적(軍籍)의 수는 채워지지 않은 채 새로운 군적인 오군영의 숫자만 늘어났던 것이다.

여러 이유로 군총은 그대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1670년(현종 11)부터 1672년까지는 이른바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이라고 부르는 유례없는 흉년이 들었다. 그것에 이어진 기근, 전염병으로 호적의 인구는 3년 사이에 약 500,000명이 줄었다. 이어서 1695년(숙종 21)부터 1700년까지 진행된 을병대기근(乙丙大饑饉)으로 다시 약 1,400,000명이 줄었다.

군액은 증가하고 인구는 줄어들자 군역에 채워 넣을 인원이 모자랐다. 이 때문에 황구첨정·백골징포·인징·족징·첩역(疊役) 등 양역의 갖가지 폐단이 야기되었다.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3가지였다. 첫째, 군역을 제대로 지고 있지 않은 한정을 색출해 내고, 둘째, 군총을 줄이며, 셋째, 양역제 자체를 폐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양역변통 초기에 시행된 것은 첫째 방법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숙종 초까지는 이전의 군제를 회복하고 새로 신설된 오군영의 군사를 채우기 위하여 간헐적으로 한정을 색출하였다. 광해군 때부터 현종 때까지 종종 논의되고 시행되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나 호패법(號牌法)이 그 예이다. 현종 후반기에는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으로 호적 인구가 급속하게 줄어들자, 숙종 초에는 다시 대규모로 한정을 색출하기 시작하였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그러나 한정을 색출해 내는 정책은 거센 저항에 부닥쳤고 기대했던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17세기 후반 숙종 초부터 두 번째 방법인 군액의 감축이 논의되었다. 무분별한 군총의 증가를 막기 위하여 군총에 일정한 수를 정한 뒤 그 정해진 수를 넘어선 군총은 조사하여 줄이는 것이었다. 군총을 일정한 숫자로 고정시킨 정책으로는 1699년(숙종 25)의 기묘정액(己卯定額), 1704년(숙종 30) 이정청(釐正廳)의 갑신정액(甲申定額), 1713년(숙종 39)의 계사정액(癸巳定額), 1714년(숙종 40)의 갑오정액(甲午定額)이 있었다. 정해진 숫자에 따라 과다한 숫자를 줄이는 조처로는 1732년(영조 8)의 임자사감(壬子査減), 1734년(영조 10)의 갑인사감(甲寅査減)이 있었다. 균역법 시행에 앞서 1742년(영조 18)에는 임술사정(壬戌査正)이 단행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양역총수(良役摠數)』를 간행하고 전국에 배포하여 군총의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균역법 제정을 2년 앞둔 1748년(영조 24)에는 『양역총수』를 보완한 『양역실총(良役實摠)』을 간행하였다(『영조실록』 24년 6월 20일).

하지만 한정을 확보하고 군총을 줄이며 운영상의 결함을 제거하는 방법은 영구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양역 문제에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으로 등장한 것이 양역변통책이었다. 이에 호포·구전·결포·유포(遊布)·유포(儒布)·신포(身布)·양포(良布)·양인포(良人布)·정포(丁布) 등 다양한 양역변통책이 대두되었다.

변천

초기에 양역변통론으로 거론된 것은 유포(儒布)유포(遊布)였다. 이는 군역을 지는 사람의 수를 늘리자는 주장으로, 한정을 색출해 내는 이전의 방책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 대상자를 양인만이 아닌 다른 신분 계층까지 확대하였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양역변통책이었다.

유포(儒布)는 양반들도 군포를 내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여기서의 ‘양반’은 양반 전체가 아니라 관료와 생원·진사를 제외한 유학(幼學) 이하의 계층을 의미하였다. 이들에게 역은 지게 하지 않고 포(布)를 부담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초기 유포 논의는 양역변통책으로서가 아닌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1659년(효종 10) 유계(兪棨)가 처음으로 양역변통책의 일환으로 주장하기 시작하였다(『효종실록』 10년 2월 11일). 그러나 유포는 번번이 양반관료들의 저항에 부닥쳤다. 신분제를 어느 정도 부정하고 사족에게 부담을 주려는 것에 대하여 보수적인 양반관료층은 당연히 반발하였다. 그러므로 유포는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결국 현종 말년을 고비로 유포론은 정책 논의 선상에서 사라졌다.

앞의 유포론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것이 유포론(遊布論)이었다. 유포론은 군역을 부담하지 않는 한유자(閑遊者)에게 역을 부과하자는 주장이었다. 한유자의 범위는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달랐지만, 대개는 양반도 아니고 상민(常民)도 아닌 그 중간층을 가리켰다. 즉, 양반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그렇다고 상민이라고도 할 수 없는 교생(校生)·군관(軍官)·한량(閑良) 등을 가리키며 때로는 서얼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양반에서 갈라져 나온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상민 가운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하여 하층 양반이 된 교생·업유(業儒)·업무(業武)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포를 징수하자는 논의는 17세기 전반부터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실행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유포(遊布)유포(儒布)와는 달리 양반이 아니라, 양반에 포함하기 어려운 양반의 하층이나 상민 상층부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유포(儒布)보다 저항이 적었다.

숙종 말년부터 경종 때에 이르기까지 유포(遊布)는 호포·구전·결포와 함께 이른바 ‘양역사조(良役四條)’ 중의 하나로 거론되어 검토되었다(『경종실록』 1년 7월 5일). 그러나 영조의 즉위와 함께 사실상 폐기되었다. 영조는 유포가 양역제의 폐단을 없애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부담자만 늘려 새로운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구전 또는 구포(口布)는 양인만 부담하는 양역을 폐기하고 일정한 나이의 남녀 모두에게 포목 또는 돈을 부과하자는 주장이었다. 사람에게 부과한다는 점에서는 양역과 같지만, 구전은 모든 신분에게 균등하게 세금을 부과하자는 파격적인 방안이었다. 양역을 없애고 구전을 시행하자는 주장은 인조 때 이미 있었다고 하나 실제로 조정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대두된 것은 18세기 초였다. 1702년(숙종 28) 우의정신완(申玩)은 완전한 균역(均役)의 방편으로 구포 시행을 주장하였다(『숙종실록』 28년 8월 11일). 그 후 1711년(숙종 37) 이이명(李頤命)이 호포의 대안으로, 남녀가 16세가 될 때부터 정포(丁布)를 부과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름만 구포에서 정포로 바뀌었을 뿐, 정포는 구포와 다름없었다(『숙종실록』 37년 8월 17일).

구전 또는 구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호포에 비해 구포가 균등한 세금 부과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구포는 양반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군역을 부담하는 것을 전제로 한 세금이므로, 양역사조 가운데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호포는 신분과 관계없이 식구 수에 따라 집을 대호·중호·소호 등 몇 단계로 나누고 그 등급에 따라 포를 부과하자는 주장이었다. 호포는 부과 대상이 사람이 아니고 신분제와도 관계없이 부과되는 세금이라는 점에서 파격적인 변통책이었다. 호포는 숙종 초부터 부각되어 1681년(숙종 7)에는 김석주(金錫冑)가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와 함께 평안병사이세화(李世華)가 주축이 되어 평안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시행 직전에 무산되었다(『숙종실록』 8년 1월 22일). 그 후 1698년(숙종 24)에도 다시 거론되었으나 곧 수그러들고 말았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유포나 구전은 시행도 어려웠지만 영조의 반대가 특히 심하여 양역사조 가운데 호포와 결포가 중요한 변통책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영조는 호포를 대안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양역을 모두 없애고 호포를 시행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라 제자리걸음 상태에 있었다.

흉년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양역변통 논의는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호포에 대하여 몇 차례에 걸쳐 여론을 들어 보고 관련 기관에서 구체적인 숫자까지 파악하며 심도 있게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집마다 부담해야 하는 정도가 영조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당초 집마다 5전 정도를 예상하였지만 실제로는 1냥을 훨씬 넘었고, 그렇게 거둔다 해도 정부 수입은 수만 냥이 부족하였다. 결국 호포는 균역법 시행 직전에 포기되었다.

결포도 호포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이 아니고 신분과도 무관하였기 때문에 파격적인 변통책이었다. 결포는 18세기 초 김유(金楺)가 처음 제기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조정에서 거론된 것은 1713년(숙종 39)이었다(『숙종실록』 39년 10월 28일). 이때 양역변통 논의를 다시 시작하면서 오래전부터 논의되던 호포와 구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새로운 대안으로 결포가 제시되었다.

1725년(경종 1)에는 이건명(李健命)이 결포를 이용한 재정개혁의 기본 틀을 제시하였다(『경종실록』 1년 8월 4일). 모든 양역을 1필로 통일하고 그 재정 결손은 토지에 결포를 부과하여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감필론(減疋論)은 양역변통책은 아니었지만 당시 양역변통 논의가 아무런 진전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유력한 방책으로 대두되었다. 이후 이건명의 방책을 계기로 결포론은 대개 감필론과 결합된 감필결포론으로 나타났다.

영조가 즉위하여 1733년(영조 9)부터 이듬해까지 다시 감필결포론이 크게 득세했고 전라감사조영로(趙榮魯)는 구체적인 시행 방안까지 거론하였다(『영조실록』 23년 10월 23일). 그 후로는 양역변통을 주도했던 홍계희·조현명에 의하여 감필결포론이 추진되었다. 결국 1750년(영조 26)에는 2필을 1필로 줄이는 감필이 결정되고, 1751년(영조 27)부터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1필을 줄인 데 대한 재정 감소를 메울 방안이 허술하여 많은 문제가 나타났다. 그해 6월에는 토지에 세금을 더 부과하여 결전을 징수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고 1752년(영조 28)부터 결전을 징수하였다. 결국 균역법은 감필결포론을 수용한 결과였다.

참고문헌

  •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 이정의 추이와 호포법」, 『성곡논총』 제13집,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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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연식, 「17·18세기 양역균일화정책의 추이」, 『한국사론』 13, 1985.
  • 차문섭, 「임란 이후의 양역과 균역법의 성립」, 『사학연구』 10·11, 1961.
  •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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