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유(業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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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

개설

업무(業武)무학(武學)을 업으로 하는 사족을 가리키는 말이듯이, 본래 업유(業儒)는 유학(儒學)을 업으로 하는 사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6세기 초에도 ‘업유’라는 단어가 기록에 등장하지만 그것은 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의 용어였지 특정한 직역 용어는 아니었다(『중종실록』 4년 5월 22일). 그러나 1625년(인조 3) 호패법이 시행되면서 업유가 직역 이름이 되었다(『인조실록』 3년 8월 8일). 이때의 업유는 사족과 사족의 유음자손(有蔭子孫)으로서 입학(入學)하지 않은 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17세기 말에는 서얼층을 뜻하는 단어로 바뀌었다.

담당 직무

업유는 양반관료와 같은 담당 직무가 없었고 생원·진사처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공식적으로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구체적인 직무 없이 유학을 업으로 할 뿐이었다.

변천

특별한 직무도 없고 자격도 없다 보니 업유의 사회적 지위는 지속적으로 낮아졌다. 점차 서얼들이 업유로 불리는 사례도 많아졌다. 그 결과 17세기 후반 숙종 초부터는 업유를 양반의 직역이 아니라 서얼의 직역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696년(숙종 22)에는 유학을 업으로 하는 서얼의 직역으로 바뀌었다(『숙종실록』 22년 9월 27일). 그 후 1708년(숙종 34)에는 서얼 자신의 대에서만 업유라고 부르고 그 아들부터는 일반 양반처럼 유학(幼學)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숙종실록』 34년 윤3월 25일). 이는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에 수록되어 완전히 법제적인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서얼의 지위는 영조대 서얼통청(庶孼通淸)·향안입록(鄕案入錄) 등이 허락되면서 어느 정도 높아졌지만 일반 양반과의 격차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업유의 지위도 양반과 상민(常民) 사이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업유의 지위가 일반 양반과 같지는 않았지만 일반 양인과는 엄연히 달랐다. 따라서 일반 양인이 부담하는 군역은 이들에게 부과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 후손에게는 유학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여 한 세대가 지나면 법적으로 양반과 다름없이 행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역이 있는 하층민의 경우에도 규정을 어기고 불법적으로 업유를 자처하는 일이 잦았다. 이로써 영조·정조대 호적에는 업유의 수가 급증했다. 그에 따라 업유에 속해 있는 자들의 사회적 지위도 실질적으로는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참고문헌

  • 이준구, 「조선후기 양반신분 이동에 관한 연구 上: 단성장적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96, 1982.
  • 이준구, 「조선후기 양반신분 이동에 관한 연구 下: 단성장적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97, 1983.
  • 이준구, 「조선후기의 ‘업유·업무’와 그 지위」, 『진단학보』 60,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