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군(正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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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제로 징병되어 군복무를 하는 정규의 군병.

개설

조선시대 신분제는 인민을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으로 나누는 중국 고대의 ‘양천제(良賤制)’를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양인은 모두 군역(軍役)을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를 원칙으로 하였다. 전문군인을 별도로 양성하지 않았고, 양인 농민이 농한기에 군역을 지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이었다. 이런 원칙 위에 군호(軍戶)를 편성하고, 16~60세인 ‘장(壯)’에 해당하는 남성에게 군역을 부과하였다. 군역은 군호를 기본단위로 군적(軍籍)을 작성해서 운영되었다. 여기에 정군의 번상을 위한 재정적 보조를 위하여 봉족(奉足), 혹은 보인(保人)이 주어졌다.

또한 정군은 정병(正兵)의 다른 이름이었다. 본래 고려말 유력자들이 지방의 농민들을 가려 뽑아 번상 시키던 시위패가 그 유래였다. 점차 나라가 안정되고 그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1459년(세조 5)에 정병으로 개칭되었다. 정병은 조선전기 군사력의 근간이 되는 병종(兵種)으로 수군(水軍)에 대하여 육군으로 존재하였다. 주로 병조 소속의 기병과 보병을 가리키는데, 충무위(忠武衛)에 소속된 군대의 한 편제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이들도 번차(番次)에 따라 번상하고 평시에는 비번(非番)인 상태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정군은 상번·조련 등으로 실제 징병되었으나, 전쟁 수행을 위한 전문군인은 아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훈련도감의 삼수(三手)를 제외하고 조선왕조에 전문군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적 의미에서 보면, 번을 서거나 조련하면서 실제 동원되는 자를 그것에 대신하여 물납하는 자들과 대비해서 가리키는 말이었다.

편성된 군호에서 호수(戶首)는 실제 군사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번차에 따라 일정 기간 중앙으로 번상(番上)하거나 지방에서 유방(留防)하는 의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정군인 호수가 번상하는 동안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봉족, 혹은 보인이 정군의 종류에 따라 수명씩 설정되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양인으로 양천신분제도에 기초하여 구성되는 특징을 갖는다.(특징이 있었다.)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조선왕조는 중국 고대적인 병농일치와 양천신분제를 수용하여 근대 직전까지 기본적으로 그 제도를 유지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에는 사병(私兵)을 해체하여 중앙의 삼군부(三軍府)에 귀속시켰고, 오위제(五衛制)로 법제화하였다. 이 오위제는 무과(武科)에 의하여 선발된 자들과 신분상의 특수군병, 징병된 정병(正兵)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지방군에는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이 있었다. 세조대에 전국적으로 진관체제(鎭管體制)가 확립되면서 지방군은 군역자인 정병으로 일원화되었다.

이들 정규의 정군에게는 그들의 경제적 뒷받침을 맡을 봉족(奉足)이 주어졌다. 병종에 따라 정군 하나에 봉족 몇을 일정하게 배정하여 하나의 군호(軍戶)를 형성하였다. 봉족제도는 세조대에 호적 개정 사업과 호패제도 강화에 힘입어 1464년 보법체제(保法體制)로 전환되었다. 갑사(甲士)와 기병(騎兵)·정병(正兵) 등은 몇 명의 보인을 배당받아 정군으로 군역을 지고, 보인은 이들에게 면포를 지급하여 그들을 경제적으로 보조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세기에 제도적인 정비를 통하여 통치체제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군역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새롭게 제기되었다.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같은 전문군인을 양성하는 기관을 설치하여 예산을 투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기존의 여러 국가기관들이 군역을 징수한다는 명목으로 개별적으로 인력을 동원하고 재원을 마련하는 무질서한 행위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말부터 각급 국가기관에 대하여 군역 정액(定額)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은 설립 초기의 정족수를 재확인하는 원칙에 따라 소속별 역종별로 군액을 고정시키고 액외(額外)의 사모속(私募屬)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정해진 군액에 실제의 건실한 장정을 충정하고 궐액(闕額)이 생기면 소속 기관이 직접 대정에 나서지 말고 도(道)와 지방 본관(本官)이 개입하게 하였다. 이 사업은 중앙 관서와 군문의 군역 역종부터 시작하여 1730년대에는 지방에 소재하는 감영과 병영·수영·통영 등의 각종 군영에 소속된 군역 역종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가 1740년대의 『양역실총(良役實摠)』으로 공표되었다.

『양역실총』은 국가기관별·역종별로 군액을 고정하였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군역자가 거주하는 군현 단위별로 고정된 군역 액수를 공표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상급 기관이 하급 기관으로 하여금 지방관청에 군역자의 충당을 강제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군역의 정액화는 각급 국가기관이 개별 분산적으로 장악하던 군역자 확보 활동을 통제하고 각 기관에 분배된 군역 재원의 액수를 파악해 둠으로써 군역 재원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운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 손병규, 「18세기 良役政策과 지방의 軍役運營」, 『軍史』 39, 國防軍史硏究所, 1999.
  • 송양섭, 「19세기 良役收取法의 변화; 洞布制의 성립과 관련하여」, 『韓國史硏究』 89, 韓國史硏究會, 1995.
  • 윤용출, 「壬辰倭亂 시기 軍役制의 동요와 개편」, 『부대사학』 13, 부산대학교 사학회, 1989.
  • 정연식, 「조선후기 ‘役摠’의 운영과 良役變通」,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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