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실각(御室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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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나 왕실 일원의 위패나 전패, 초상화를 모신 건물.

개설

어실각(御室閣)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원당(願堂)으로 지정된 사찰에 지어진 건물이다. 원당주의 위패(位牌), 전패(殿牌), 초상화 등을 봉안하였는데 조선전기까지는 고려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왕의 초상화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조선중기 이후에는 초상화 대신 위패나 전패로 교체되었다. 어실각에 배치되는 물품들은 왕실에서 직접 하사하였으며 어필(御筆)이나 어첩(御帖)을 함께 봉안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조선전기

조선시대의 어실은 고려의 진전이 변형된 것이다. 조선초까지는 사찰에 마련된 진전이 어실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점차 별도의 진전이 마련되면서 어실과 진전은 각각 분리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설치한 어실은 흥천사 사리전이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정릉(貞陵) 내에 흥천사를 창건하고 사리전에 신덕왕후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또 흥천사 계성전은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이었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인 1446년(세종 28)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심씨(沈氏)가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 보전(寶殿)을 짓고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한 뒤, 다음 해에 경찬회(慶讚會)를 열었다. 이 법회에 참석한 수양대군은 기도를 하던 중 불사리(佛舍利)에서 광명이 비치는 것을 목격한 뒤 이 절을 원찰(願刹)로 지정하고 어실각을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어실각은 1907년(고종 44) 정미의병 봉기 때 소실된 것을 1938년에 복원한 것이다.

세조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 원당으로 지정한 사찰 중 강원도 금강산 일대에 있는 유점사(楡岾寺), 표훈사(表訓寺), 건봉사(乾鳳寺) 3사찰에 건립한 어실각에 대한 기록과 유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특히 건봉사는 1465년(세조 11) 세조가 동쪽으로 행차할 때 직접 들러 5일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의 원당으로 삼았다. 또한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2) 조선후기

조선후기인 1716년(숙종 42)에 사간원에서 왕에게, 강원도 고성 유점사에 어실중당(御室中堂)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인조와 현종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하게 하라고 했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숙종실록』 42년 5월 12일). 이 기록에 나오는 어실중당은 세조 때 유점사가 원당이 되면서 지어진 어실각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어실각의 실례로는 1740년(영조 16) 영조가 경기도 파주 보광사를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묘인 소령원(昭寧園)의 능침사로 지정하면서 지은 어실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어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또한 1754년(영조 30) 영조는 건봉사에 숙종의 어제절함도(御製折檻圖)와 어필서(御筆書)를 내려 어실각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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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의 봉선사(奉先寺)에서는 임진왜란 때 세조의 영전을 모신 봉선전이 불타자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각을 세웠는데, 1758년(영조 34)에는 영조의 양모인 영빈김씨의 묘를 장현리로 옮기게 되자 숙종과 숙종의 세 왕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위패도 어실각에 함께 봉안하였다.

1908년(순종 1) 대한제국의 국가 제사권이 박탈되면서 사찰이 담당하는 조포(造泡)의 역(役)은 모두 폐지되었는데, 이후 사찰에 있던 어실각은 대부분 조사전이나 명부전 등 다른 전각명으로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
  •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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