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휴(朴承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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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6년(선조 39)~1659년(효종 10) = 54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집의(執義)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참판(參判)이다. 자는 자미(子美)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충청도 덕산(德山) 출신이다. 아버지는 통례원 봉례(奉禮)박안행(朴安行)이며, 어머니 한양조씨(漢陽趙氏)는 교위(校尉)조흥무(趙興武)의 딸이다. 이조 판서(判書)박충원(朴忠元)의 증손자이고, 목사(牧使)박승건(朴承健)의 중형이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30년(인조 8) 아우 박승건(朴承健)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635년(인조 13)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는데,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여러 학도들 중에서 유독 그의 여유롭고 자상한 태도에 대해 칭찬하였다. 이때 유생(儒生)들이 이이(李珥)·성혼(成渾)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소청(疏請)하자, 그 반대파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서 두 선생을 비방하였다. 인조가 반대파의 말을 받아들이자, 많은 유생들이 권당(捲堂)하여 성균관을 비우고 물러갔다. 그러나 그는 혼자 문묘를 떠나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들이 모두 떠나버리면 누가 문묘를 지킨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가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이 되었을 때, 인조가 “이 사람은 을해년(인조 13)에 혼자 문묘를 지킨 자가 아닌가?”라고 묻기도 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淸)나라 군사가 침입하자,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아버지인 박안행은 인조를 따라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는데 어찌 혼자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고종 4촌형 장령(掌令)조극선(趙克善)과 같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나라 군사와 싸우려고 모의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에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항복하고 굴욕적인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그는 한 동안 세상일에 뜻이 없어서 향리(鄕里)에서 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었다.

효종 시대의 활동

1650년(효종 1) 45세 때 아우 박승건(朴承健)과 나란히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의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그해 승문원(承文院) 전적(典籍)에 임명되었고 이어 호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이 되었다. 1652년(효종 3) 11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사헌부의 지평·장령들이 개좌(開坐)하던 날 박승휴는 실록청(實錄廳)에 내려준 마장(馬裝)이 남잡(濫雜)하다고 탄핵하려고 하였다. 장령서원리(徐元履)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그는 의견이 서로 맞지 않다며 인피(引避)하였다.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는데, 병조의 장관(長官)이 하급 관리의 말에 따라 특정 인사를 임용하려고 하자, 박승휴는 이에 반대하였다. 그 뒤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서 세자시강원에 있을 때 동궁(東宮: 현종)을 보필하는 도리에 대해 상소하였다. 1654년(효종 5) 8월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을 구제할 방책을 아뢰었다. 1655년(효종 6) 2월 전국 8도에 추쇄어사(推刷御史)를 파견할 때 경상좌우도의 추쇄어사로 임명되어 경상도를 순행하였다. 그해 6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11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그 뒤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임명되었으나, 고향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홍주는 어버이가 사는 덕천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였으므로, 며칠마다 반드시 혼자 필마(匹馬)로 찾아가서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부임한 지 겨우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는 효도를 못 다한 것을 더욱 한스러워하였다. 아버지 상복(喪服)을 벗자, 공주목사(公州牧使),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연달아 임명되었다. 1659년(효종 10) 2월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해 11월 17일에 돌아가니, 향년이 54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효성과 우애가 독실한데다가 성품까지 조용하였으므로 비록 관직에 있을 때에도 항상 대문을 닫고 다른 사람과 잘 사귀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알 지 못하였고, 혹은 ‘숨은 군자(君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정자(程子)·주자(朱子)의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항상 조용히 앉아서, 묵중하고 엄숙하게 공부하였다. 비록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였으나, 사람들이 그 앞에서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

조성한(趙晟漢)이 쓴 그의 「효행장(孝行狀)」(『동산유고(東山遺稿)』 권2 「박집의 승휴 효행상(朴執義承休孝行狀)」)을 보면, 그는 부모에 대한 효행이 남달랐다. 어머니가 60세가 넘어 풍질(風疾)을 앓다가, 병의 증세가 악화되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먹여 다시 목숨을 살려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자, 여러 날 물과 간장을 먹지 않았다. 홀로 된 아버지를 모실 때에는 밤낮으로 그 옆을 지키고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이부자리를 몸소 깔아드리고, 잠자리를 모실 때에는 반드시 몸을 아버지가 누운 쪽으로 향하여 옆으로 누웠으며, 앉거나 서서 있을 때에도 몸을 반드시 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향하여 앉거나 섰다.

박승휴가 세자시강원에 있을 때, 세자 현종을 가르치는 방도를 마련하여 가르쳤으므로 현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죽은 뒤에 동생 박승건이 청나라 연경(燕京)으로 사신을 가면서 현종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는데, 현종은 박승휴와 닮은 박승건을 보고는 측근에게 박승건의 안부를 물었다. 측근이 이미 박승건이 죽었다고 아뢰자 현종은 슬픈 표정을 짓고 고인을 회고하면서 탄식하였다고 한다.(「묘갈명」 참조)

비문과 후손

사후에 이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고, 동산(東山)조성한이 그와 그 아들의 효행장(孝行狀)을 지었다. 부인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김영지(金榮址)의 딸인데, 사재(思齋)김정국(金正國)의 고손녀이다. 자녀는 6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 박신주(朴新冑)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마사(兵馬使)를 지냈다. 5남 박상주(朴相冑)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지성(至誠)으로 효도하였기 때문에 향당(鄕黨)에서 그 아버지와 아들 부자의 효행을 칭찬해 마지 않았다.(「효행장」 참조)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동산유고(東山遺稿)』
  • 『동주집(東州集)』
  • 『야곡집(冶谷集)』
  • 『백주집(白洲集)』
  • 『낙정집(樂靜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