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투(坎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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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 모양의 챙이 없는 쓰개.

개설

고깔 모양의 챙이 없는 쓰개로 양반들은 관모 밑에 받침용으로 썼고, 서민이나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는 외출용으로, 군사들은 방한용으로도 사용하였다. 말총·가죽·직물·모(毛)로 만들었으며, 드물게 지승(紙繩)으로 만든 것도 있다.

연원 및 변천

감투[坎頭]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고려사(高麗史)』「여복지(與服志)」 관복에 관한 규정에 보면 “녹관(祿官) 근무 시 삼관(三官)의 각 영위정(領尉正)은 감투(坎頭)·고정립(高頂笠)·직령(直領)·전대(纏帶)를 착용한다.”고 해 고려시대부터 입(笠) 안에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국한회어(國漢會語)』에는 감투를 ‘탕건(宕巾)’으로 표기하고 있어, 차양이 없이 머리 부분만 덮는 탕건과 감투가 형태 면에서 유사성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각종 어휘집에서는 ‘모모자(帽帽子)’, ‘소모자(小帽子)’, ‘정모자(頂帽子)’, ‘전모(氈帽)’, ‘양모모(羊毛帽)’ 등을 감투로 언해하고 있어, 감투는 챙이 없는 소모자형으로 펠트나 양모를 재료로 사용했던 것 같다.

감투가 비교적 낮은 계층에서 평상시에 사용하는 쓰개였음은 다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1416년(태종 16) 예조(禮曹)에서 “향리(鄕吏)가 관문(官門)을 드나들 때와 대소사객(大小使客)을 영송(迎送)할 때에는 두건(頭巾)을 쓰고, 보통 때에는 감투를 써서 평민(平民)과 다름이 없어 무례(無禮)하게 되므로 방립(方笠)에 흑칠(黑漆)을 하여 사용하게 하소서.”라는 기사이다.[『태종실록』 16년 1월 2번째기사]

군사들에게 털옷, 털모자 등 방한복을 내려주는 목록에 감투가 포함되어 있고[『성종실록』 3년 12월 3번째기사], 중국인에게 의복을 하사한 목록에 모감투(毛甘套) 1벌이 포함되어 있어 방한용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성종실록』 10년 12월 12번째기사].

제주도에 표류한 중국인이 감투를 쓰고 있었으며, 조선 사람들에게 감투를 주었다는 기사도 있다[『성종실록』 10년 6월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의 ‘아청필단초피감토이엄(鴉靑匹段貂皮甘吐耳掩)’, ‘아청단자감토(鴉靑段子甘吐)’, ‘아청필단초피감토부이엄(鴉靑匹段貂皮甘吐付耳掩)’, ‘흑양모감토(黑羊毛甘土)’, ‘아청저사감토(鴉靑紵絲甘吐)’ 등의 기사로 보아 감투의 색상은 아청색·흑색이었고, 재료는 비단·양모·모시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보예관복(步藝冠服)의 기록에 대해 “왜검, 교전, 권법을 익히는 자가 쓰는 쓰개”로 기록하고 있다. 그밖에 19세기 투전이나 윷놀이 풍속을 담은 그림에서 보면 감투가 평상시에 서민들이 즐겨 착용하던 쓰개임을 알 수 있다.

형태

고깔 모양이며,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턱과 챙이 없다.

용도

감투는 일반 남자들의 일상적인 쓰개 외에 모자 받침용·방한용·무예용·무복용(武服用)으로도 사용되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감투는 직책이나 직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의 뜻도 가지고 있다. ‘감투 벗다’라고 하면 ‘높은 직위에서 물러나다’라는 의미이며, 감투밥·감투거리·감투싸움 등의 용어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된다.

참고문헌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김은정·강순제, 「감투에 관한 연구」, 『복식(服飾)』제57권 6호,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