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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7 기준 최신판



선릉과 정릉의 능침사로, 서울특별시 강남구삼성동에 위치한 절.

개설

조선 성종을 모신 선릉을 조성할 때 인근에 있던 견성사(見性寺)를 능침사로 지정하면서 봉은사(奉恩寺)로 이름을 고쳤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는 봉은사를 기반으로 불교 중흥을 도모하였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면서 대신들과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려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여 선교양종을 부활하고 승과 제도를 실시하였다. 문정왕후가 승하한 후 봉은사에 대한 왕실의 지원도 축소되었지만 숙종대에 중창되었으며 정조대에 전국 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의 하나가 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서울특별시 강남구삼성동에 있는 봉은사는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모신 선릉(宣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이다. 1495년(연산군 1)에 성종이 승하하여 선릉에 안장되자 정현왕후가 근처에 있던 견성사를 능침사로 지정하고 봉은사라는 이름으로 고쳐 불렀다. 그리고 자신도 훗날 선릉에 안장되었다.

견성사의 창건 시기는 신라시대라고 전하지만 기록이 미비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잘못 이해한 때문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794년(신라 원성왕 10) 7월에 봉은사를 창건했다고 하였지만 이 사찰은 경주 근처에 있었던 사찰로, 지금의 봉은사와도 아무 관련이 없는 사찰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도 견성사와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봉은사는 개경 남쪽에 있던 사찰로서 매년 연등회와 팔관회가 개최될 때 왕이 행차하였던 태조왕건의 원당(願堂)이었다. 서울의 봉은사와 관련한 기록은 선릉의 능침사로 지정된 이후부터 나타난다.

(2) 조선전기

봉은사는 선릉의 능침사로 지정된 이후 국가로부터 전지(田地)를 비롯하여 소금 등의 각종 지원을 받았으며(『연산군일기』 5년 12월 12일), 광릉 봉선사의 전례에 따라 왕패(王牌)를 하사 받았다(『연산군일기』 7년 3월 17일). 중종 때는 어떤 승려가 궁궐 안으로 잠입하여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는데 심문을 하던 도중에 죽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승려가 죽기 전에 봉은사 주지로 있던 행사(行思)를 통해 경복궁 안으로 들어왔다고 진술하였다(『중종실록』 34년 5월 27일). 봉은사 주지를 통해 경복궁을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봉은사는 왕실과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성균관 유생들은 이단(異端)의 뿌리가 되는 곳이 봉은사와 봉선사라고 하면서 철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두 사찰이 선왕 선후의 사찰이라는 이유로 폐사를 허락하지 않았다(『중종실록』 34년 6월 4일).

봉은사가 크게 발전한 것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집권할 때이다.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면서 봉은사를 중심으로 불교를 중흥시켰다. 조선전기 불교는 태종과 세종의 억불 정책과 연산군의 폐불 행위로 점차 정치·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태종은 모든 종파를 7개로 통폐합하고 88개의 사찰만을 공인하였으며 전국적으로 80,000명의 사원노비를 해방시키거나 국가에 귀속시켰다. 세종은 7개의 종파를 다시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하고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하였다. 그리고 연산군은 선종과 교종의 업무를 청계사로 이관하여 사실상 불교에 대한 보호를 포기하였다. 또한 중종은 공식적인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僧科)마저 완전히 폐기하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문정왕후는 허응보우(虛應普雨)를 등용하여 불교의 중흥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보우는 15세를 전후하여 금강산마하연(摩訶衍)에서 출가하였고, 금강산과 용문산을 오가며 20여 년 간 수행하였다. 보우의 일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1548년(명종 3)에 봉은사 주지로 발탁되면서부터이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의 적임자를 찾던 중 보우를 천거 받고 봉은사 주지에 발탁하였던 것이다.

보우는 문정왕후에게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하고 승과를 다시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문정왕후는 1550년(명종 5) 12월에 마침내 선교양종의 복립을 명령하였다(『명종실록』 5년 12월 15일). 그리고 이듬해 6월에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지정하였으며, 보우는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에, 수진(守眞)은 판교종사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 주지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6년 6월 25일). 그리고 1551년(명종 6) 11월에 승려 선발 시험인 승시(僧試)를 실시하여 승려 신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신분증명서를 발행하는 도첩제를 부활시켰고(『명종실록』 7년 1월 10일), 1552년(명종 7) 4월에는 승려 관리 선발 시험인 승과 고시를 부활하여, 교종시(敎宗試)는 봉선사에서 실시되고 선종시(禪宗試)는 봉은사에서 실시되었다(『명종실록』 7년 4월 12일). 이때부터 승과가 총 5회 실시되어 매번 선종 21인과 교종 12인을 선발하였는데, 제1회 선종시에서 청허휴정이 합격하였고 제4회 선종시에서는 사명유정이 합격하였다.

한편 문정왕후는 중종을 모신 정릉(靖陵)을 1562년(명종 17)에 선릉 옆으로 옮기면서(『명종실록』 17년 8월 20일), 봉은사를 선릉 동북쪽으로 1㎞쯤 떨어진 수도산으로 옮겨지었다. 당시 새로 지은 전각이 모두 19개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봉은사 가까운 곳에 남편 중종을 안치하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히고자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1565년(명종 20)에 승하하자 명종은 정릉이 있는 곳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잦고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이유로 현재의 태릉(泰陵)에 문정왕후를 안치하였다(『명종실록』 20년 5월 30일). 문정왕후의 죽음은 불교중흥정책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명종은 끊임없이 이어지던 유생들과 대신들의 보우 탄핵 요청을 번번이 거절하였으나 어머니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결국 보우는 제주목사변협(邊協)에게 살해당하였다.

(3) 조선후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후 선교양종과 승과 제도 등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정책은 모두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봉은사의 사격 또한 상당히 축소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능침사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당우가 소실되었던 것을 선화(禪和) 대사 경림(敬琳)이 중건하였고, 숙종대에 다시 왕실의 도움으로 중창되었다고 한다. 정조대에는 전국 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었다. 5규정소란 승려들의 과실을 바로 잡는 사찰을 의미하였는데, 봉은사를 비롯하여 양주 봉선사, 남한산성 개운사, 북한산성 중흥사, 수원 용주사를 말한다. 봉은사는 강원도 사찰, 봉선사는 함경도 사찰, 개운사는 충청·경상도 사찰, 중흥사는 황해·평안도 사찰, 용주사는 전라도 사찰을 감찰하였다.

19세기 봉은사의 가장 큰 불사는 『화엄소초(華嚴疏抄)』(전 90권)의 판각이었다. 조선후기에 복각되어 유통된 『화엄소초』는 1681년 중국 표류선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된 가흥대장경에 수록된 경전이었다. 당시 백암성총이 가흥대장경의 여러 경전들을 수집하여 복각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화엄소초』였다. 그런데 낙안징광사에 보관되어 있던 『화엄소초』 목판이 1770년의 화재로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덕유산 영각사에 있던 설파상언(雪坡尙彦)이 주도하여 1773년(영조 49)~1775년(영조 51)에 그 전체를 다시 복각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80년이 지나 잦은 인경(引經)으로 인해 목판이 마멸되어 인출한 책의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고, 또 목판이 남부 지방인 덕유산에 있었기 때문에 경기도 지역에서는 인출본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1855년에 남호영기(南湖永奇)가 봉은사에 경전을 간행하는 기구인 간경소(刊經所)를 설치하여 이를 다시 복각하고, 3,479판에 이르는 경판을 봉은사 판전(板殿)에 봉안하였다.

20세기에도 봉은사는 여전히 선종의 본산으로 인식되어 대한제국이 1902년에 사찰령을 제정하여 사사관리소를 설치하였을 때도 전국 14개 수사찰(首寺刹)에 포함되었고, 일제 총독부가 1911년에 정한 30본산에도 포함되어 8군 78개 말사를 관할했다.

참고문헌

  •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봉은사 사지』, 사찰문화연구원, 1997.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종수,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부각」, 『서지학보』56, 서지학회, 2013.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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