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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3 기준 최신판



여자 무당[巫]과 남자 무당[覡]을 합쳐서 부르는 말.

개설

무격(巫覡)은 여자 무당과 남자 무당인 박수를 함께 부르는 용어이면서, 무당(巫堂)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인 『국어』「초어(楚語)」에, "여자 무당을 무(巫)라 칭하고 남자 무당을 격(覡)이라 칭한다."고 나와 있다. 조선전기에 무격은 활인원에 소속되어 구료(救療)에 임하였다.

변천

고려는 후기에 이르러 무격에 대한 배척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하지만, 1021년(고려 현종 12) 5월 경진일(庚辰日)에도 토룡(土龍)을 남성(南省) 뜰 가운데에 만들어 놓고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였다고 한 기사가 있다. 가뭄이 심할 때 무격을 시켜 기우제를 지내는 일은 조선에도 이어진 오랜 관행이었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오면 성 안에서 음사(淫祀)를 벌이는 무격들을 성 밖으로 축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형법의 금령에도 이러한 여론이 반영되어 이후 무격들은 성 안에 살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무격은 신분상으로 사천(私賤)에 해당하였다. 백정이나 배우, 창녀(娼女) 등과 같은 격이다. 간혹 천민을 칭할 때 공사천예(公私賤隷)로 통칭한 다음 무격을 비롯하여 창기(娼妓)·공상(工商)·승니(僧尼)·매복맹인(賣卜盲人) 등을 덧붙이기도 한다. 조선전기에는 그 자신과 자손이 나라로부터 전답을 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1401년(태종 1) 4월 13일에 태종은 명나라의 예제에 따라 무당굿을 봄·가을에만 행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년 4월 13일). 음사를 금하기보다는 감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또한 나라에서 공인하는 무격은 활인원에 배치되었다. 1415년(태종 15) 6월 25일에는 육조에서 각사가 진언한 33개의 사안 중에 안성군(安城君)이숙번(李叔蕃)이 "활인원에 나누어 소속시킨 무격으로 하여금 병인(病人)들을 돌보아 보호하게 하고, 매년 세말(歲末)마다 활인한 인원의 다소를 상고하여 10명을 살린 자는 상을 주어 뒷사람을 권장하고 마음을 쓰지 않은 자는 죄를 논하소서."하고 진언하였다(『태종실록』 15년 6월 25일). 활인원은 1414년(태종 14)에 두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활인서로 바뀌었으며, 신공(身貢)인 신포세(神布稅)를 받기 위해 무녀만 소속되었다.

1478년(성종 9) 1월 20일 임금은 사헌부에, "무격이 풍속을 이루고 음사가 크게 행해져서 무식한 사람들이 쏠리니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모조리 성 밖으로 쫓아내게 하였으나 근년에 금법(禁法)이 차츰 풀리어 도성 안에서 예전과 같이 자행하여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으니, 거듭 밝히어 엄하게 금하라."고 전교하였다(『성종실록』 9년 1월 20일).

성종 때까지 주로 거론되던 음사 문제는 궁 및 도성 안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음사 행위를 성 안에서 금지시키고 이를 성 밖으로 몰아내는 데에 있었다. 지방에 대해서는 신명(神名)을 통일하는 등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데에 그치는 정도였으며, 직접 음사로 다스린 대상은 간혹 전라도 나주의 금성산(錦城山) 성황 등 두드러진 곳에 국한되었다. 즉 무격 현상과 관련한 주요 관심이 왕이 살고 있는 궁내와 정치의 중심인 도성 안에서의 음사 행위에 있었던 것이다. 지방의 무격 현상에 대해서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금령이 번다하면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는 것이므로 작은 일이라 할 수 있는 음사를 가혹하게 사찰하지 말라."는 입장이었다(『중종실록』 12년 9월 14일).

중종대 사헌부에서는 "『대전(大典)』에 ‘경성 안에 무격은 논죄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사한 무리가 여염에 섞여 살면서 사람들을 속여 재물을 가져가 살림을 넉넉히 하니 이 때문에 외방(外方)에서 무격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경성으로 모여드는데, 세민(細民)이라면 모르겠으나 사대부의 집에도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요사한 말로 선동하니 교화를 더럽히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부에서 소문에 따라 적발하여 성 밖으로 쫓아내어도 곧 성안으로 들어오는데, 식별하기 어려우므로 막을 길이 없습니다. 동서활인서의 문부에 등록된 무녀와 오부(五部)에서 찾아낸 무격 등을 모두 경성에서 200리 이상 떨어진 각 고을에 원하는 데에 따라 분배하고, 소재한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늘 순찰하여 단속해서 다른 데로 가지 못하게 하고, 세초(歲抄) 때마다 이름을 열기(列記)하여 본부로 이문(移文)하는 것을 항식으로 삼아서 요사하고 음란한 풍습을 아주 끊으소서."라고 무격들을 금단하도록 아뢰고 있다.

이에 대한 왕의 전교는 "『대전』에 경성에서 살지 못하게 하고 성 밖으로 내쫓는 법이 있으므로 법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만약에 따로 과조(科條)를 세워서 일체 외방으로 내쫓고 다른 데로 가지 못하게 한다면 적잖게 억울할 뿐 아니라 시끄러울 듯하다."며 여전히 무격에 대한 규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무격이 궁중에 드나드는 현상은 근절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1624년(인조 2) 9월 13일에 대사간김상헌(金尙憲) 등이 국정과 수양에 대해 "대체로 무격의 귀신 섬기는 일과 부처의 화복(禍福)에 관한 말은 말세 이래로 빠져드는 사람이 많은데, 부녀자의 성품은 더욱 미혹되는 경향이 있어 깨닫게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간의 경우 대부분 이 병폐에 걸리고 있는데 궁궐 안이라고 해서 어찌 유독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조용히 보내시는 여가에 시험 삼아 물어 보시어 과연 그런 일이 있으면 즉각 통렬하게 끊어 버리시고 혹시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더욱 두절시켜야 마땅합니다. 이와 함께 승려의 내사 출입을 일체 금단하심으로써 끝내 청명한 다스림이 되도록 하소서."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다(『인조실록』 2년 9월 13일).

1683년(숙종 9) 12월 2일의 기사에도 윤지선(尹趾善) 등이 대궐 안에서 전신(餞神)을 한다는 설이 전파되고 있음을 아뢰는 것을 통해 여전히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내일 대궐 안에서 전신한다는 설이 여항간에 전파되고 있는데, 법궁(法宮)은 지엄한 곳이라 결코 무격이 음사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대신(臺臣)의 상소가 진실로 앞일을 구정(捄正)하려는 뜻에서 나왔으나 아직도 명백한 비지(批旨)가 없으시니 신 등이 더욱 절실히 근심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숙종실록』 9년 12월 2일).

1743년(영조 19)에 작성된 『수교신보』에 의하면 무녀가 궐 안으로 들어와 곤룡포를 입고 신사(神祀)를 설행하는 것은 극히 놀라운 일이어서, 이러한 자들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한다고 하였다. 이 형벌 조항은 1698년(숙종 24)에 정한 것으로, 1744년(영조 20)에 폐기되었다. 그러나 조항이 폐기되었다고 하여 그러한 행위를 용납하겠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1745년(영조 21)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맹제(盲祭), 무제(巫祭), 독경제(讀經祭)를 모두 없앴다. 맹제와 무제는 기우 때, 독경제는 이어(移御) 때 해왔던 공인된 제의였으나 실제로는 정폐(停廢)된 지 오래되었고 태상제안(太常祭案)에만 남아 있던 것을 이때 제안(祭案)에서 공식적으로 모두 없앤 것이다. 『속대전』「금제조」에는 여전히 신사(神祀)를 하는 자는 경성 밖 10리에 한하여 음사를 금단하게 하였다. 하지만 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 남급(濫及)하는 일이 없도록 단서를 달았고, 고사(告祀)는 물금(勿禁)한다고 세주에 명기하는 등 무속 행위에 대해 한층 완화된 조처가 내려졌다. 그러나 1763년(영조 39) 사헌부에서 지평임일원(任一源)이 무녀를 도성 밖으로 쫓을 것을 건의하자 임금이 이를 따른 데서 볼 수 있듯이 무당을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금제 조치들은 일관되게 적용되어 왔다.

의의

이상에서 보듯이 무격 행위는 그것이 일반 도성민의 일상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아 국초 이래로 근절되지 못한 오랜 민속이었기 때문에, 이를 못하게 막되 형벌까지 내리지는 않은 소극적인 법 적용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무격 현상은 조선 이전에도 있어 왔고 조선 이후 지금까지도 행해져 내려오는 오랜 종교 현상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유교 및 관련 의례의 보급으로 이전 시기보다도 축소되고 주변화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수교신보(受敎新補)』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