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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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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도배 |
한글표제 | 도배 |
한자표제 | 塗褙 |
상위어 | 영건(營建), 영조(營造) |
하위어 | 도배지(塗褙紙), 삼배(三褙), 재배(再褙), 정배(正褙), 초배(初褙) |
관련어 | 각장(各張), 괴화(槐花), 교말(膠末), 귀얄(歸也), 낙폭지(落幅紙), 능화지(菱花紙), 들기름(法油), 명유(明油), 소나무 기름[松脂], 유둔(油芚), 유지(油紙), 자저모(家豬毛), 장지(壯紙), 장지(狀紙), 전지(箋紙), 주지(注紙), 촛농(滓燭), 콩가루[太末], 콩가루[太汴], 호미(糊米), 휴지(休紙) |
분야 | 문화/예술/건축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대한제국 |
왕대 | 태조~순종 |
집필자 | 정정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배(塗褙)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10년 5월 22일 |
건물 내부의 천정, 바닥, 벽, 창호 등에 종이나 천을 발라 마감하는 일.
개설
도배(塗褙)는 건축물의 내부 천장이나 벽에 진흙을 바르고 회칠을 하여 그림을 그리던 고대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이나 종이를 발라 도배를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제지술의 발달로 다양한 재료로 종이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도배가 일반화되었다.
내용
전통 건축물의 벽체는 일반적으로 구조체인 기둥 사이에 싸리나무나 수수깡 등을 이용하여 외엮기를 하고 그 위에 흙을 두텁게 발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벽체는 바깥쪽에 회를 바르거나 벽돌로 마감하고, 안쪽은 흙벽, 사벽(沙壁), 회벽 등으로 마무리한다. 그 가운데 흙만으로 마감된 벽은 내부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위생적으로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열 환경 조절 등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배를 한다.
전통 건축물의 도배는 일상생활 공간인 방의 내부에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궁궐과 관영 건물의 공사를 기록한 『영건의궤』를 보면 일상생활 공간 이외의 곳에도 도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궁궐의 생활공간인 침전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의 방·주방·곳간뿐만 아니라 정무와 공식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전·편전, 그리고 제례 공간 등에도 도배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들의 도배는 일반인들이 사는 주택과는 달리 색과 무늬가 있는 도배지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격식에 맞는 내부 공간을 꾸미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들이었다.
도배의 공정은 흙벽 위에 바로 종이를 발라 도배의 밑을 마련하는 초배(初褙), 초배 후에 초배지(初褙紙)보다 지급이 높고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여 바르는 재배(再褙), 마지막으로 외부에 보이는 부분을 깨끗하게 마무리하거나 공간의 분위기와 격식을 만드는 정배(正褙)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정배 과정은 무늬나 색이 있는 종이를 이용하게 된다. 때문에 비교적 격(格)이 높은 공간일수록 바르는 횟수가 많아진다.
도배지를 바를 때 사용하는 풀은 아교 가루[膠末]나 호미(糊米)를 물에 타서 만들고, 풀칠용 귀얄[歸也] 나무판에 집돼지 털[家豬毛]을 촛농[滓燭]과 소나무 기름[松脂]을 이용하여 붙여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풀과 귀얄을 이용하여 도배를 하고 나면 도배지가 들뜨고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표면에 기름칠을 하게 된다. 바닥의 경우에는 콩가루[太末, 太汴]와 들기름[法油]을 섞어 문지르고, 반자의 경우에는 황색 염료인 괴화(槐花)에 들기름에 무명석을 넣어 끓인 기름인 명유(明油)를 섞어 칠을 한다. 수회에 걸친 칠하고 말리기가 마무리되면 도배 공정이 끝나는 것이다.
○ 도배지의 종류와 용도
도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배지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영건의궤』에 등장하는 도배지의 종류는 크게 재료, 제작 기법, 무늬, 염색, 용도를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기준으로 의궤에 기록된 도배지의 종류를 나누어보면 백지류(白紙類), 주지류(注紙類), 유지류(油紙類), 유둔류(油芚類), 각장류(各張類), 장지류(壯紙類)·장지류(狀紙類), 능화지류(菱花紙類), 염색·전지류(染色·箋紙類), 휴지류(休紙類), 낙폭지류(落幅紙類), 기타로 구분된다.
전시기의 기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백지(白紙)는 닥나무 껍질을 재료로 하여 얇게 만들어진 종이를 말하며, 흰 종이 전체를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세조실록』에 중국의 백지는 뽕나무 껍질[桑皮]을 재료로 하여 만든 흰 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세조실록』 10년 5월 22일), 세조 이후 조선에서 제작된 백지는 닥나무 껍질을 재료로 하여 얇게 도련(擣鍊)한 것을 말한다. 백지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벽, 바닥, 천장, 창, 문, 기둥 등 실내 모든 곳에 제일 처음 바르는 초배지의 용도였다.
주지(注紙)는 주지(奏紙)에서 비롯된 용어로 주문(奏文)에 쓰이는 종이를 뜻한다. 주지(奏紙)라는 용어는 15세기 이전에만 사용되었으며, 16세기 이후 왕실의 편년체 기록에는 종이의 종류를 표현하는 용어에 더 이상 ‘주(奏)’ 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16세기 이후에는 주지(注紙)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지만, 이전의 기록을 통해 주지류는 본래 주문을 작성하던 고급의 종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주지(楮注紙)는 격식이 높은 공간의 재배지로 주로 사용하였으며, 초주지(草注紙)는 기둥과 창, 문 등 초벌로 도배를 끝내는 경우에 사용하였다.
유지(油紙)는 들기름을 먹인 각종 종이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유지는 닥나무로 만든 저지(楮紙)에 기름을 입힌 것인데, 이를 특별히 저유지(楮油紙)라고 한다. 유지 가운데 두께가 얇은 것은 박유지(薄油紙)라고 하며, 장지(壯紙)에 기름을 먹여 질기며 방수가 가능하게 한 것을 장유지(壯油紙)라고 한다. 유지류는 누각이나 온돌방의 정배지로 사용된 것이며, 의례에서는 상(床)이나 탑(榻)에 까는 좌면지(座面紙)의 용도로도 기록되어 있다.
유둔(油芚)은 기름을 먹인 두꺼운 종이로 여러 장을 이어 붙여 사용하였다. 유둔 중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여섯 장를 이어 붙인 육유둔(六油芚)과 네 장을 이어 붙인 사유둔(四油芚)이다. 유둔은 비를 막거나 바닥에 까는 등 습기를 방지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그 두께가 일반 종이보다 두꺼워야 했으므로 유둔은 이미 제작된 종이에 기름을 먹인 것이 아니라 별도로 제작한 종이를 사용하였다.
각장(各張)은 주로 공문서나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영건의궤』에는 육유둔처럼 온돌바닥을 도배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닥나무를 재료로 만든 두껍고 질긴 종이를 장지(壯紙)라 한다. 『태종실록』의 태종 7년 10월 24일의 기록에 따르면 장지는 본래 공문서인 서장(書狀)을 작성하기 위해 제작된 종이라고 한다. 그 명칭은 17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장지(狀紙)에서 장지(壯紙)로 변화하였다. 서장을 작성하기 위해 제작된 장지는 수시로 펼쳐 보아도 손상되지 않아야 하는 등록(謄錄), 도록(圖錄), 도형(圖形)을 작성할 때 사용되었으며, 각장처럼 온돌을 도배하는 데도 쓰였다.
초주지에 염색을 하거나 운모 가루로 마름모 형태의 무늬를 찍어 만든 종이를 통칭하여 능화지(菱花紙)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능화문(菱花紋)은 종이뿐만 아니라 많은 기물의 표면을 장식하고자 할 때 사용되던 무늬이다. 시기에 따라 마름모 안쪽의 무늬들이 글자, 꽃, 식물, 기하학적인 무늬 등으로 변화하였다. 조선시대 능화문이 찍힌 종이는 주로 책의 표지와 도배지로 사용되었는데, 그 색상이 매우 다양하였다. 방의 내부를 마감하기 위한 도배지로 사용된 능화지는 붉은색의 홍릉화(紅菱花), 옥빛의 옥색릉화(玉色菱花) 등이 있었으며, 일상생활 공간은 푸른색으로 염색한 청릉화(靑菱花)와 염색하지 않은 백릉화(白菱花)를 주로 사용하였다. 청릉화가 창호의 테두리나 반자틀 등 대(帶)를 이루는 부분을 도배하는 데 사용된 반면, 백릉화는 벽면, 천장면, 기둥의 전면을 도배하는 데 사용되었다.
18세기경에는 왜릉화(倭菱花), 왜소오동백릉화(倭小梧桐白菱花) 등 ‘왜(倭)’ 자가 접두어로 붙은 능화지들이 특별히 눈에 띈다. 이들은 왜닥[倭楮]을 원료로 한 저지에 능화문을 찍은 종이, 일본의 오동꽃 무늬를 넣어 찍은 능화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능화지 등 다의미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의 용도는 다른 능화지와 마찬가지로 격식이 있는 공간의 정배지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장식지로 사용된 종이는 능화지이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각종 색을 입힌 염색지와 목판으로 글이나 무늬를 찍어 만든 전지류가 등장하여 도배를 더욱 다채롭게 한 듯하다. 『영건의궤』에 도배지로 등장한 염색지·전지류는 궁궐 침전의 온돌방, 영전, 사묘의 감실 등 최고의 격식이 갖추어져야 하는 공간에 사용되었다.
휴지는 원래의 용도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거나 부분적으로 잘라내어 크기가 훼손된 종이를 말한다. 휴지는 사용하는 물건이나 주변이 손상되지 않도록 깔거나 덮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단청을 할 때 안료가 주변에 묻지 않도록 휴지를 까는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백휴지의 경우는 큰 손상이 없으므로 주로 도배지로 사용되었다. 격식이 있는 공간에서는 초배지로 사용하여 그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백휴지만으로 도배를 하기도 하였다.
낙폭지(落幅紙)는 과거 시험에 떨어진 자의 답안지로 정시낙폭지(庭試落幅紙), 감시낙폭지(監試落幅紙), 동당시낙폭지(東堂試落幅紙) 등 과거의 종류에 따라 분류된다. 낙폭지는 종류와 품질이 다양하게 섞여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곳의 초배지나 장(欌)의 내측을 바를 때만 사용되었다.
앞서 언급한 도배지 이외에 중국산 종이의 하나로 희고 매우 얇으며 단청이나 탱화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주로 사용된 분당지(粉唐紙), 닥나무가 아닌 등나무 껍질, 뽕나무 껍질, 마 등을 이용하여 제작하는데 지질이 약하지만 밝고 가늘며 부드럽고 연한 모면지(毛面紙), 짚을 원료로 한 마분지(馬糞紙), 귀리를 원료로 한 고정지(稿精紙), 천장을 도배하기 위한 반자지(斑子紙), 창과 문을 도배하기 위한 연창지(烟窓紙)와 백면지(白綿紙), 주로 과거 시험을 위한 시권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소호지(小好紙)와 대호지(大好紙) 등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변천
도배의 변화는 도배지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벌 바르기에서 초배와 재배에 사용되는 도배지는 대부분 외부로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가장 많이 생산되면서도 지급과 가격이 낮은 종이를 사용한다. 시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백지가 초배지와 재배지로 기록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공간의 품격과 장식을 위한 정배지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비교적 많은 변화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선 시기의 기록에는 특별히 무늬가 있는 종이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반면, 17세기 이후부터는 점점 무늬가 있고 염색된 종이의 종류가 많아지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영건의궤』의 기록을 살펴보면, 17세기에는 청릉화지(靑菱花紙), 백릉화지(白菱花紙), 당지(唐紙)만 기록되어 있는 반면, 18세기에는 홍릉화지(紅菱花紙), 남릉화지(藍菱花紙), 왜백릉화지(倭白菱花紙), 왜소오동백릉화지(倭小梧桐白菱花紙), 백오동왜릉화지(白梧桐倭菱花紙), 별백릉화지(別白菱花紙)가 더 등장하며, 색지로는 옥색선자지(玉色扇子紙)가 추가되어 있다. 19세기 이후의 『영건의궤』에는 18세기와는 또 다른 능화지와 염색지가 기록되어 있다. 능화지의 종류로는 ‘왜~지(倭~紙)’의 종류가 보이지 않는 대신에 수복문당릉화지(壽福紋唐菱花紙), 빙문릉화지(氷紋菱花紙) 등이 새롭게 나타나며, 삼색지(三色紙), 청염지(靑染紙), 황염지(黃染紙), 청선자지(靑扇子紙), 흑선자지(黑扇子紙), 각색궁전지(各色宮箋紙), 금전지(金箋紙), 홍당지(紅唐紙) 등의 다양한 색지가 등장하였다. 20세기 이후에는 능화지의 종류로 양릉화지(洋菱花紙)가, 색과 무늬가 있는 종이로는 냉금전지(冷金箋紙), 용봉지(龍鳳紙), 종자문반자지(鐘子紋斑子紙), 홍선자지(紅扇子紙), 홍염지(紅染紙)가 이전과 다른 것들이다.
이처럼 시기에 따라 유행하는 무늬가 달라지고 염색지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이들 중에는 도배의 용도가 아니라 의궤를 제작하거나, 기타 중요한 문서를 꾸미는 데 사용된 종이가 기록된 경우도 있다. 『영희전영건도감의궤』의 도침백지(搗砧白紙), 홍염지, 황염지 들은 앞에서 언급한 예로 의궤를 작성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종이들을 기록한 경우이다.
장식지 이외의 도배지는 18세기 화성성역을 기점으로 많이 변화한다. 화성성역이 있기 이전, 장식지 이외의 종이로는 백지, 후백지(厚白紙), 저주지, 초주지, 도련지(搗鍊紙), 도련지(擣鍊紙), 반자지, 연창지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화성성역의궤』에는 모면지, 분당지가 더 기록되어 있다. 또 19세기에 진행된 현사궁 별묘 공사에서는 백면지가 종류를 더하고 있으며, 20세기 초반부터는 양반자지(洋斑子紙), 고정지, 이첩지(二貼紙), 삼첩지(三貼紙), 고사지(古査紙), 소호지, 마분지 등 더욱 다양해진 도배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경대각(京大角), 외각(外角) 등 생산 지역을 표기한 종이도 보인다. 종이에 들기름을 먹여 만든 유지의 종류도 후유지(厚油紙), 박유지 등 두께만을 나누던 것이 유대장지(油大壯紙), 유절락(油節落), 장유지, 백유지(白油紙) 등 더욱 세분화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건의궤』에 기록된 종이나 도배지의 종류가 모든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건물 공사 관련 의궤에는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의 기록뿐만 아니라 수리나 개수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부분적으로 수리하는 경우 공사 규모가 영건 공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공사에 소용되는 자재의 양도 적게 된다. 도배 공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리 및 개수 공사의 기록에는 훨씬 적은 도배지의 종류가 정리되어 있다. 분당지나 모면지의 경우 『조선왕조실록』 전 시기에 걸쳐 골고루 등장하고 있어, 다른 기록과의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의의
도배는 영건 공사 중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위생적이고 장식적으로 꾸미기 위하여 하는 마감 공사이다. 도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배지이다. 시대에 따른 도배지 종류의 변화를 통해 사회 및 문화 흐름의 일부분을 읽을 수 있으며, 건축적으로는 제지술의 변화를 알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창경궁수리소의궤(昌慶宮修理所儀軌)』
-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
-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
-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
-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
- 『영녕전수개도감의궤(永寧殿修改都監儀軌)』
- 『남별전중건청의궤(南別殿重建廳儀軌)』
-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 『종묘개수도감의궤(宗廟改修都監儀軌)』
- 『의소묘영건청의궤(懿昭廟營建廳儀軌)』
- 『수은묘영건청의궤(垂恩廟營建廳儀軌)』
- 『건원릉정자각중수도감의궤(健元陵丁字閣重修都監儀軌)』
- 『경모궁개건도감의궤(景慕宮改建都監儀軌)』
-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
- 『만기요람(萬機要覽)』
-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
-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 『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
-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宗廟永寧殿增修都監儀軌)』
- 『남전증건도감의궤(南殿增建都監儀軌)』
-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
- 『영희전영건도감의궤(永禧殿營建都監儀軌)』
-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탁지준절(度支準折)』
- 경기문화재단 편집부, 『화성성역의궤 건축용어집』, 경기문화재단, 2007.
- 장기인, 『한국건축사전』, 보성각, 2005.
- 久米康生, 『和紙の文化史』, 木耳社, 1976.
- 久米康生, 『和紙の源流』, 岩波書店, 2004.
- 정정남, 「조선후기 산릉의궤를 통해본 정자각의 도배와 포진」,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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