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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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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금교도 |
한글표제 | 금교도 |
한자표제 | 金郊道 |
하위어 | 금교역(金郊驛), 흥의역(興義驛), 보산역(寶山驛), 안성역(安城驛), 금암역(金巖驛), 용천역(龍泉驛), 검수역(劍水驛), 동선역(洞仙驛), 경천역(敬天驛), 단림역(丹林驛), 소곶역(所串驛) |
관련어 | 역도(驛道), 관승(館丞), 참로찰방(站路察訪), 절령로(岊嶺路), 황주로(黃州路), 자성로(棘城路), 동선보산도(洞仙寶山道), 역승(驛丞)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조병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금교도(金郊道) |
조선시대에 황해도 금천에서 평산·서흥·봉산·황주까지 교통의 요지에 설치된 역참을 관할한 역도(驛道).
개설
조선시대의 금교도(金郊道)는 ‘황해도 7참(站)’이라 불렸으며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의주로 중 금천에서 황주 구간의 교통 요지에 설치된 역참을 관할하였다. 고려시대 황해도 지방에는 금교도와 절령도(岊嶺道)가 있었다. 조선전기 성종 연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할 무렵에는 금교도·기린도(麒麟道)·청단도(靑丹道)로 분화됨에 따라 금교도의 속역은 그 수가 줄어들었다. 금교도에 속한 역로(驛路)는 조선초기에 국왕이 온천에 가거나 사냥 및 강무를 행할 때 이용하였으며, 사신을 전송하는 교통로의 역할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금교도는 황해도 평산에서 황주에 이르는 구간에 설치된 역참을 관할하였다. 이 구간은 한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이자 사행로였다. 조선초기인 1413년(태종 13)에는 경기도와 풍해도의 일부 역도를 개칭하면서, 풍해도 7참을 동선보산도(洞仙寶山道)로 고치고 역승(驛丞)을 파견하였다. 그 뒤 금교참(金郊站)에서 풍해도 경천참(敬天站)까지를 찰방(察訪)이라 했던 것을 역승으로 고친 것으로 보아, 역승과 찰방을 번갈아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1415년(태종 15)에는 풍해도의 9개 역참에 관승(館丞) 1명을 두어 금교경천도관승(金郊敬天道館丞)이라 불렀다. 이후 세종 연간에는 참로찰방(站路察訪)이라 하여 찰방 1명을 임명하고, 금교참(金郊站)·흥의참(興義站)·금암참(金巖站)·보산참(寶山站)·안성참(安城站)·용천참(龍泉站)·검수참(劍水站)·절령참(岊嶺站)·동선참(洞仙站)·경천참(敬天站) 등 10개 역참을 소속시켰다.
이후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참(站)’을 ‘역(驛)’으로 통일함에 따라 금교도의 속역은 모두 역으로 개칭되었으며, 그에 따라 금교도는 금교역 외에 우봉의 흥의역, 평산의 보산역·안성역·금암역(金岩驛), 서흥의 용천역, 봉산의 검수역·동선역·소곶역(所串驛), 황주의 경천역·단림역(丹林驛) 등으로 편제되었다.
금교도의 커다란 변화 중 하나는 고려시대에 자비령(慈悲嶺)을 넘어가던 서흥과 황주를 잇는 절령로(岊嶺路)가 폐지되어 봉산(鳳山)으로 이설되고, 검수역 및 경천역이 신설되어 황주로(黃州路)라고도 불리는 자성로(棘城路)가 발달한 점을 들 수 있다.
금교도의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 감영조에 따르면, 금교도 본역인 금교역에는 찰방 1명, 역노비 42명과 역마 97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금교도의 본역인 금교역의 경우 평산으로 이설되어 보산역으로 개칭되었는데, 『여지도서』황해도 평산 역원조에 따르면 찰방 1명, 역리(驛吏) 48명, 통인(通人) 12명, 사령(使令) 20명, 역노(驛奴) 84명, 역비(驛婢) 15명과 역마 11필이 배정되어 있었다.
변천
조선시대 금교도는 고려시대의 금교도와 절령도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전기 『경국대전』 시기에 이르러 황해도 지방의 역도가 금교도·기린도·청단도로 분화되면서 확립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금교도의 속역은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금교참·흥의참·금암참·보산참·안성참·용천참·검수참·절령참·동선참·경천참 등 10개 역참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이후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기존의 10개 역참 중 절령참이 빠지고 소곶역이 포함되었으며, 단림역(丹林驛)이 추가로 신설되었다. 또한, 금교도의 본역인 금교역이 강음현(江陰縣) 오조천(吾助川)에서 조선시대에는 금천(金川)으로 이설되어 보산역(寶山驛)으로 개칭되었다가 또다시 평산(平山)으로 옮겨 금교역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의 절령로에 위치한 절령역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자성로를 개척하여 검수역 및 경천역을 신설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해동지도(海東地圖)』
- 『동여도(東輿圖)』
- 『황해도읍지(黃海道邑誌)』
- 『금교역체등중기책(金郊驛遞等重記冊)』
-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조병로, 「조선후기의 驛誌분석-關西驛誌를 중심으로-」, 『동국사학』18,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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