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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서 사용하는 약재와 신하에게 하사(下賜)하는 의약의 공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정3품 관서.

개설

전의감은 고려의 전의시(典醫寺)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 건국 직후 태조가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할 때에 설치되었다. 전의감은 내의원이 설치되기 이전에 내용(內用) 약재의 조달과 왕실 및 조관(朝官)의 진료, 약재의 사여(賜與), 약재의 재배와 채취, 외국 약재의 구입 및 판매, 의서 편찬, 의학 교육 그리고 취재(取才) 등 국가의 모든 의료 사업을 관장하였다. 이후 내의원이 설치되고 여기에 왕실에 관한 의약 업무가 이전됨에 따라 조관의 진찰과 의학 교육 등을 담당하면서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전의감은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말의 전의시를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전의시는 1023년(고려 현종 14)에 설치된 태의감에서 기원되었고, 이후 사의서, 전의시, 태의감 등으로 개칭되다가 1372년(고려 공민왕 21)에 다시 전의시로 개칭되면서 정착되었다. 1392년에 설치된 전의감은 진찰과 약을 짓는 것을 담당하고, 관원에는 정3품 판사(判事) 2명, 종3품 감(監) 2명, 종4품 소감(少監) 2명, 종5품 승(丞) 2명, 종6품 주부(主簿) 2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종8품 박사(博士) 2명, 정9품 검약(檢藥) 4명, 종9품 조교(助敎) 2명이 있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11년(태종 11) 종약색(種藥色)을 혁파하여 전의감에 병합하고, 1416년에는 의학의 취재(取才)를 전의감에서 담당하게 하였다. 이로써 관료들의 진료, 약재의 사여와 약재의 재배, 의학 취재 등 의학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였다.

조직 및 역할

1392년 전의감 설치와 함께 둔 판사 이하 관원은 이후 관제 개정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변천되면서 정비되었다가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1433년(태종 3) 판사 1인이 삭감되었고, 1414년 감이 정(正), 소감이 부정(副正), 승이 판관(判官)으로 개정되었다. 1416년 의생의 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의(儒醫)를 두었으며, 1420년(세종 2) 검약 2명이 삭감되었다. 다시 1466년(세조 12) 『경국대전』의 편찬과 관련된 대대적인 관제 정비 때 판사가 정, 정이 부정, 부정이 첨정(僉正), 검약이 부봉사(副奉事), 조교가 참봉(參奉)으로 바뀌고, 겸정과 직장 각 1명이 삭감되고 판관 1명이 증가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경국대전』에는 종1~종2품관이 겸하는 제조(提調) 2명과 정 1명, 부정 1명, 첨정 1명, 판관 1명, 주부 1명, 의학교수 2명, 직장 2명, 봉사 2명, 부봉사 4명, 의학훈도 1명, 참봉 5명으로 규정되었다. 또 『경국대전』에는 관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제수 절차를 규정하였다. 관원은 취재(取才) 때 점수가 좋은 사람을 뽑아 제수하고, 판관 한 사람은 구임(久任)으로 하고, 구임과 교수, 훈도를 제외한 관원은 체아직(遞兒職)으로 1년에 두 차례 도목(都目)을 거쳐 공과를 평가하여 승진 또는 출척시켰다. 취재 시에 차점자는 외임(外任)으로 차출하고, 주부 이상의 관원은 반드시 과거에 합격한 사람으로 임명함으로써 의학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 이유는 전의감의 교수와 훈도가 고등 의학 교육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교육을 위해서 특별히 의학에 밝은 사람으로 임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임토록 함으로써 교육에 매진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의감에는 의생(醫生) 50여 명이 소속되어 의학을 학습하였고, 이와 함께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 30명을 배치하여 의학의 발전을 꾀하였다. 아울러 의과(醫科) 시험을 전의감에서 담당하였는데,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式年試), 경사에 치러지는 증광시(增廣試) 등에서 초시·복시를 거쳐 9명을 선발하였다.

전의감의 주된 업무 중의 하나는 지방에서 공납(貢納)으로 올라오는 향약재의 감독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전의감에서 심약(審藥)을 각 도에 파견하였다. 전의감에서는 향약재의 채취 시기와 채취 방법, 약재의 수량, 건조법(乾燥法) 등을 각 도의 교유(敎諭)에게 지시하여 채취하게 하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처벌하도록 하였다. 귀한 약재의 채취에는 직접 의관을 파견하였다. 또한 교유와 의생(醫生)이 담당하였던 지방에서 질병이 심하거나 장기간 지속되어 전파될 우려가 있을 때에는 전의감에서 양의(良醫)와 약품을 보내 구료하였다. 지방관의 질병이 심할 때에도 전의감에서 의원을 파견하여 치료하였다.

특히 전의감의 주된 업무인 조관(朝官)의 진료는 1402년(태종 2) 좌시중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실행되었다. 1432년(세종 14) 3품 이하의 관원이 질병을 고하면 의관을 보내어 구료하도록 하였고, 1440년(세종 22)에는 2품 이상과 종친의 경우에는 승정원(承政院), 3품 이하는 예조(禮曹)에 고하여 진료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청심원(淸心圓), 소합원(蘇合圓) 등 구급약을 만들어 일반 백성에게 판매하기도 하였다.

변천

『경국대전』에서 법제화된 전의감은 의사의 통합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고 일부 관원이 삭감되면서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다만 1506년(연산군 12)에 부정을 없애고 의학교수 1명, 봉사 1명, 부봉사 2명, 참봉 3명이 각각 삭감되면서 운영되었다. 그 외에 『육전조례』에 따르면 치종교수(治腫敎授) 1명이 있어서 종기 치료를 담당하는데, 삼의사(三醫司)에 있는 침의(鍼醫)를 번갈아 임명한다고 하였다. 직명이 교수임을 보면 종창을 치료하는 것 이외에 교육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종창의 치료를 담당하는 침의도 3명이 있었다.

1882년(고종 19) 의약과 서민의 질병구료를 관장하던 혜민서(惠民署)와 도성의 병난 사람을 구료하던 활인서(活人署)가 혁파되고 그 기능이 전의감에 이전됨에 따라 전의감은 조관과 도성 내 민간의 의약·구료·의학교육을 전담하게 되었다(『고종실록』 19년 12월 29일). 1894년 갑오개혁 때 관아의 혁거와 함께 그 기능이 궁내부(宮內府) 부속기관인 내의원과 내무아문(內務衙門) 위생국에 이전되면서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김두종, 『한국 의학사』, 탐구당, 1993.
  • 김신근, 『한국 의약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 손홍렬, 『한국 중세의 의료 제도 연구』, 수서원, 1988.
  •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몸과 의학의 한국사』, 역사비평사, 2004.
  • 최정환, 『역주 『고려사』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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