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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5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성균관 하급관원인 학정(學正)·학록(學錄)이 근무하던 청사.

개설

정록청은 향관청(享官廳)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8칸의 널찍한 건물로 성균관의 학정과 학록이 근무하던 곳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정록소는 1397년(태조 6)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한 도성건설 때 성균관 에 부속된 문묘·명륜당·동재·서재 등과 함께 건립되었다. 성균관의 참하관(參下官)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태종이방원이 고려 말에 ‘정록소에서 근무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로부터 이어받은 기구임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즉위 교서에는 정록청이 학관으로서의 업무 외에 문과의 초시에 해당하는 단계에서 한성부 거주 응시자들의 전형을 담당하게 되어 있다. 또 생원시의 초시를 통과한 공생(貢生)에게 사서(四書)와 업경(業經)을 시험 보는 업무도 맡았다. 권근(權近)도 「권학사목(勸學事目)」에서 생원시 응시자들이 『소학』을 읽었는지를 정록소로 하여금 확인하게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정록청은 서울과 지방의 생원들을 정기적으로 소집하고 그들의 원점(圓點)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문과와 생원시 회시의 녹명(錄名)이라는 중요한 절차를 관장하기 때문에 정록소는 1401년(태종 1)에 “부모상을 당한 사람은 복상 기간인 3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소서.”라는 상소를 올려 관철시켰다. 또 정록청은 신급제자들을 소집하여 기강을 잡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조직 및 역할

학정은 정8품의 관리로 3명이 성균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업무는 정록소의 도장 관리와 유생들을 검찰하는 것이었다[『세종실록』 25년 9월 11일]. 학록은 정9품의 관리로 역시 3명씩 성균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변천

정록청은 1506년(중종 1) 성균관의 동·서재, 명륜당의 동·서 협실(夾室), 향관청과 함께 수리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다른 성균관 건물과 함께 소실되었다. 1601년(선조 34)~1606년(선조 39)의 1차 성균관 공사 때에 대성전·명륜당·문묘 등이 중건된 데 이어 1626년(인조 4) 2차 공사 때에 정록소는 존경각 등과 함께 중건되었다. 광복 후에는 성균관과 유도회(儒道會)의 중앙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태학지(太學志)』
  • 신석호, 「이조초기의 성균관 정비와 그 실태」, 『대동문화연구』6·7,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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