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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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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영흥진 |
한글표제 | 영흥진 |
한자표제 | 永興鎭 |
관련어 |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영흥도(永興道), 영안도(永安道)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훈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영흥진(永興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종실록』 2년 5월 8일, 『세종실록』 8년 2월 10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연산군일기』 4년 4월 4일 |
조선시대 함경도 영흥 지역에 설치한 지방 방위 조직인 진관.
개설
고려공민왕 때 반원정치를 단행하면서 원나라가 세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철폐하고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하였다. 그 뒤 화령부로 승격되었다가 조선 태조대에 영흥부로 바뀌었다. 태종대에 군(郡), 또는 목으로 강등되었다가 세종대에 영흥대도호부가 되었다.
군익도(軍翼道)체제에 편제되면서 영흥도가 되었다가 세조대에 진관(鎭管)체제로 개편되면서 비로소 영흥진(永興鎭)이 세워졌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뒤 영흥부로 승격되면서 진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그 결과가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연산군대에 다시 대도호부로 격하되면서 더불어 소속 진도 바뀌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공민왕 때 반원(反元)정치를 단행하면서 원나라가 세운 쌍성총관부를 철폐하고 화주목을 설치했다. 얼마 뒤 화령부(和寧府)로 승격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1393년(태조 2)에 영흥부(永興府)로 개칭하고, 지금의 철원에 있던 영흥현(永興縣)은 영평현(永平縣)으로 바뀌었다. 이는 태조가 태어난 곳을 부각하려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다. 아울러 동북면병마절제사로 하여금 영흥윤(永興尹)을 겸하게 했다.
1398년 정도전(鄭道傳)의 건의로 안변(安邊) 이북 청주(靑州) 이남을 영흥도(永興道)라 칭하고, 단주(端州) 이북 공주(孔州) 이남은 길주도(吉州道)라 칭하여 동북면도순문찰리사가 통치하게 했다. 그런데 동북면도순문찰리사가 영흥부윤을 겸하는 것으로 보아(『정종실록』 2년 5월 8일), 도순문사영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토관직(土官職)도 두었다.
하지만 1402년(태종 2)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일어나 군(郡)으로 격하되었으나, 1404년(태종 4) 원상 복구되었다. 1413년에는 계수관(界首官)의 첫 글자를 따서 도명(道名)을 영길도(永吉道)로 고쳤다. 1416년 함주목(咸州牧)을 함흥부(咸興府)로 승격시키고 영흥부를 화주목으로 내리면서 함길도(咸吉道)로 바뀌었다. 그러나 태조이성계의 탄생지라는 이유로 영흥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세종실록』 8년 2월 10일).
일찍이 태조대부터 군익도로 편제되면서 영흥도로 불렸는데 화주로 격하된 뒤에는 화주도(和州道)로 바뀌었다. 중익(中翼)에 화주, 좌익(左翼)에 안변(安邊), 선천(宣川), 우익(右翼)에 고원(高原), 문천(文川), 용진(龍津)이 속했다.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영흥도로 바뀌었으나, 소속 고을에는 변동이 없었다. 1455년(세조 1) 양계(兩界)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巨鎭)을 두고서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다. 영흥도에는 중익에 영흥·고원, 좌익에 예원(預原)·용진, 우익에 안변·덕원·문천이 소속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조직 및 역할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다. 이때 영흥진이 비로소 설치되었는데, 처음에는 용진·고원·예원이 소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그런데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뒤 성종대에 함흥을 군으로 강등시키는 대신 영흥을 부로 승격시켰다. 또 다른 거읍이었던 안변의 첫 글자를 따서 도 이름을 영안도(永安道)로 개칭하였다. 이 조치로 인하여 진에도 변화가 생겼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러 종2품의 영흥부윤이 관찰사·병마절도사를 겸하여 진관을 통솔하였다. 그에 소속된 정평에서는 부사가, 함흥·고원에서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영흥판관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면서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중앙에 올라가 대열(大閱) 등에 참가했을 때에는 오위(五衛)에 소속되었고, 후위(後衛)였던 충무위(忠武衛)의 후부(後部)에 속하였다.
변천
연산군대에 영흥이 너무 남쪽에 치우쳐 북도의 백성들이 왕래하기 힘들며 지역이 지나치게 좁고 성곽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함흥을 승격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크게 일어났다. 마침내 1498년(연산군 4)에 함흥을 부로 승격시키고, 영흥을 대도호부로 격하시켰다. 이로 인해 도 이름도 영안도에서 함경도(咸鏡道)로 바뀌었다(『연산군일기』 4년 4월 4일). 이로 말미암아 자연히 함흥이 제외되는 등, 소속 진들의 변동이 불가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를 개편하면서 진관체제도 변하였다. 먼저 진관 소속에 변동이 생겼는데,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따르면 병마절제도위가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로 승격하였다. 이는 영흥부에서 영흥대도호부로 바뀐 것과 관련이 있었다. 즉 영흥판관을 혁파하는 대신에 영흥대도호부사를 임명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병마절제도위는 삭감되었으나 그 밖에 정평이나 고원의 경우에는 변화가 없었다.
한편 지방군을 강화하고자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여 처음에는 전임 영장을 두었으나 비용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병자호란 이후에 하삼도, 즉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제외하고는 수령에게 영장을 겸임하게 했다. 『속대전(續大典)』에 영흥부사가 중영장(中營將)을 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