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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1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종묘(宗廟), 궁궐(宮闕) 등의 건설을 맡았던 임시 관청.

개설

‘영건’은 일반적으로 건물 등을 건축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도감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영건도감’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그 이전에 궁궐 등을 수리하거나 영건할 때에는 수리도감(修理都監)·수개도감(修改都監)·개수도감(改修都監) 혹은 조성도감(造成都監) 등이 설치되어 공역을 담당하였다. 영건도감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는 1606년(선조 38) 무렵이다. 이때 종묘영건도감(宗廟營建都監)과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이 설치되었다. 영건도감보다 격이 낮은 ‘영건청’이 임진왜란 이후 설치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선조대 설치된 종묘영건도감과 궁궐영건도감은 임진왜란 때 불탄 종묘와 궁궐을 새로 짓기 위해 설치한 영건도감이었다. 이때 종묘와 창덕궁을 새로 지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무렵 대체적인 공역을 완료하였다. 종묘와 창덕궁이 영건도감을 두고 다시 지은 것에 비해 창경궁은 영건청을 설치하여 건설하였다. 1617년 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이 바뀐 경덕궁(慶德宮)과 인경궁(仁慶宮)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선수도감(繕修都監)을 설치하였다. 이 선수도감은 신궐영건도감(新闕營建都監)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 시기 새 궁궐의 건설을 담당하였다.

조직 및 역할

도감은 대체로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등 당상(堂上)과 낭청(郎廳), 기타 서리(書吏) 등으로 구성되었다. 영건 내역과 중요도 등에 따라 참여하는 관원의 직급이 달랐고, 여러 직급의 관원들이 겸직하였다. 예를 들어 180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 따르면, 제조에 겸호조판서이만수, 호조 판서조진관이 차출되었고, 이 밖에도 낭청 2명과 별공작 4명, 별간역 3명을 비롯해 영역패장(領役牌將)·계사(計士)·서리·정원(政院) 대령서리(待令書吏)·고직(庫直)·사령·사환기수·문서지기·사고지기(私庫直)·관사환(官使喚)·서원(書員)·포교·포졸 등이 차출되었다.

변천

인조대 이후로는 영건도감이 설치된 적이 거의 없다가, 영조대에 영건도감을 설치한 예가 나타난다.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된 여러 능침(陵寢)의 비(碑)에 대한 비역(碑役)을 복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제 공역을 진행하면서는 ‘영건청’으로 조정된 듯하다. 파리국립도서관과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있는 의궤들이 『(세종)영릉표석영건청의궤』, 『(신의왕후)제릉신도비영건청의궤』, 『목릉휘릉혜릉표석영건청의궤』, 『의소묘영건청의궤』, 『희릉태릉효릉강릉장릉능표석영건청의궤』, 『능표석영건청의궤』 등 ‘영건청’의 이름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한편 정조가 즉위하고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조성하며 영건도감을 설치한 적이 있다. 1805년(순조 5)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영건 당시에도 설치된 바 있다. 이때의 공역 기록은 『인정전영건도감의궤』로 남아 있다. 1824년에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을 건축하기 위해 영건도감을 설치하였고, 1829년 경희궁 화재 이후에는 서궐영건도감이, 1833년 창덕궁과 창경궁 화재 이후에는 창덕궁영건도감과 창경궁영건도감이 각각 설치되었다. 이때의 공역은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 『서궐영건도감의궤』, 『창덕궁영건도감의궤』, 『창경궁영건도감의궤』로 각각 남아 있다.

이후 영건도감은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설치되었다. 이때의 영건도감은 경복궁 중건을 마친 후에도 계속해서 성문을 수리하고 문묘(文廟)대성전(大成殿), 종묘, 영녕전(永寧殿), 각 능의 정자각(丁字閣) 등의 수리를 담당하며 1872년 무렵까지 남아 있었다.

1899년(광무 3)에는 영희전을 건축하며 영건도감을 설치하였다. 영건도감에서는 영정의 이봉(移奉)과 건축을 담당하였고 1900년에 공역을 마쳤다. 이때의 공역은 『영희전영건도감의궤』로 기록이 남아 있다. 1902년 경운궁의 중화전(中和殿)을 창건할 때에도 영건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이때의 공역은 『중화전영건도감의궤』로 남아 있다.

식민지 시기에는 도감이 아니라 주감(主監)이 설치되었으므로 중화전영건도감이 영건도감 중 마지막으로 설치되었다.

대체로 3년 전후로 공역을 진행하고 이를 마치면 혁파되었다. 그러나 공역의 성격에 따라 광해군대 신궐영건도감이나 고종대 경복궁영건도감처럼 6년 이상 운영된 경우도 있었다.

참고문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4~2004.
  • 서울대학교 도서관 편,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서울대학교 도서관, 1978~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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