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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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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심양관 |
한글표제 | 심양관 |
한자표제 | 審陽館 |
동의어 | 심관(瀋館) |
관련어 | 소현세자(昭顯世子)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중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폐지 시기 | 1645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심양관(審陽館) |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서 머문 관소로, 일명 심관(瀋館).
개설
병자호란의 결과 체결된 정축화약에 따라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서 머문 관소인 심양관은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까지 8년 동안 유지되었다. 심양관의 운영을 위하여 호방·예방·병방·공방 등을 두어 각기 임무를 나누어 맡았고 그 운영 경비는 조선과 청나라가 나누어 부담하였다. 특히 심양관은 조선과 청나라 간에 외교 현안이 있을 경우 자주 청나라의 관련 아문과 교섭하여 문제를 해결하던 장소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37년(인조 15) 1월 말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함으로써 병자호란이 종결되었다. 그 결과 체결된 정축화약(丁丑和約)에 의하여 왕세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瀋陽)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그해 4월 10일 소현세자 일행은 심양에 도착하여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客館)인 동관(東館)에 머물다가 5월 7일 청 태종이 소현세자를 위하여 새로 지은 관소(館所)인 신관(新館)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관소가 심양관이었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이후 8년을 머물게 되었다. 세자는 이곳에서 평상시에는 매달 1일과 15일에 망궐례(望闕禮)를 지내는 등 문안드리는 일을 하였고, 시강원 관원과 더불어 서연(書筵)에 나아가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 심양관은 ‘주청조선대표부(駐淸朝鮮代表部)’의 역할을 하였는데, 조선과 청나라 간에 외교 현안이 있을 경우에는 자주 이곳에서 직접 청나라의 관련 아문과 교섭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직 및 역할
심양관에는 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하여 따라온 신하인 배종신(陪從臣)·질자(質子)·수행원 등이 있었고, 이들에게 딸린 종인들까지 합하면 상주 인원은 500명이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있는 심양관의 운영을 위하여 호방(戶房)·예방(禮房)·병방(兵房)·공방(工房) 등을 두어 각기 임무를 나누어 맡도록 하였다. 심양관의 경비는 청나라에서 식량과 물품 중 일정 부분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조선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1641년부터는 청나라에서 심양관에 토지를 지급하여 채소밭을 가꾸고 가축을 길러 식품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1641년 12월에 청 황제의 명으로 600일 갈이의 토지를 떼어 주었고, 이듬해에는 다시 400일 갈이의 토지를 주어 총 1,000일 갈이의 토지가 지급되었다. 이곳의 경작을 위해 심양관에서는 여러 곳에 둔소(屯所)를 두고 각각 감관(監官)을 파견하여 농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작인들은 주로 청나라에 잡혀 온 채삼인(採蔘人)이나 속환인(贖還人) 등이었다. 조선에서도 세자에게 평안도에서 매월 삭선(朔膳)을 보냈고 특별한 때에는 별찬(別饌)·세찬(歲饌) 등을 보내었다. 그 밖에도 심양관에서 필요한 물품이나 찬값·의복 등을 호조에서 보내 주었다. 조선에서 사신이나 관원이 들어오고 청의 요청에 따라 군병이 들어오거나 교체되는 등의 일이 있을 때 모두 심양관을 거쳐 갔다. 1641년 겨울 김상헌(金尙憲)을 비롯한 조선의 척화신들이 청에 잡혀 와 북관에 갇혀 있을 때에는 심양관에서 이들에게 의관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는 등 돌보았다. 이외에도 1639년 청나라에서 처형된 시강원 관원 정뇌경(鄭雷卿)을 제사 지내고 시신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변천
거주하는 관원이 늘어나고 처리할 일이 점차 많아지면서 1640년 9월 이후 소현세자는 여러 차례 공사를 벌여 창호를 수리하고 관소를 증축하기도 하였다. 1643년 4월 역관(譯官)들이 유숙할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심양관의 건물을 증축하기도 하였다.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현안이 늘어남에 따라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하여 조선을 견제하고 조선이나 명나라·일본에 관련된 각종 정보를 얻어 내려고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1637년 9월 용골대 등이 심양관에 나타나 일본 사신이 조선에 왔는지를 묻고, 일본이 청나라와 통신할 의향이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요구하였다. 소현세자도 심양관에서 청과의 주요 현안, 예를 들어 청나라가 징병(徵兵)이나 징향(徵餉) 등을 청에서 소현세자에게 직접 전결(專決)로 처리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는 인조의 권한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았다. 청은 소현세자를 활용하여 인조를 길들이려 하였고 이로 인하여 인조는 청이 소현세자를 내세워 자신을 폐위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후 소현세자와 인조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졌다.
참고문헌
- 『소현동궁일기(昭顯東宮日記)』
- 『심양일기(沈陽日記)』
- 『심양장계(沈陽狀啓)』
- 김남윤, 「『심양일기』와 소현세자의 볼모살이」, 『규장각』 29, 2006.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 허태구, 「소현세자의 심양 억류와 인질 체험」, 『한국사상사학』 40,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