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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7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충청도 지역의 도로망인 금정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충청도 홍성군 홍성읍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조선 세종 때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한 데 이어, 세조 때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세천역(世川驛)은 금정도(金井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충청도 홍주목에는 세천역과 용곡역(龍谷驛)이 있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기록된 충청주도(忠淸州道) 34개 역 중에는 세천역과 용곡역이 없고 홍주역(洪州驛)만이 보일 뿐이다. 충청남도 홍성군의 옛 지명이 홍주였는데 여기에 홍주역이 있었고, 또 조선시대의 용곡역은 오늘날 충청남도 청양군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홍주역이 세천역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세천역은 조선 세종 연간에 전국의 역로를 44역도-527속역 체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광시역(光時驛)·용곡역 등과 함께 금정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홍주 편에 따르면, 세천역에는 상등마 2필, 중등마 3필, 하등마 5필 등 총 10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35명, 역노(驛奴) 58명, 역비(驛婢) 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1872년(고종 9)에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역마 10필과 역마를 맡아 기르는 마호(馬戶) 10명이 있었으며, 복호결(復戶結)은 20결(結)이 지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시대의 역제(驛制)는 세조 연간에만 세 차례나 개편되었다. 그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1462년(세조 8)에는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찰방(察訪)역승(驛丞)을 두어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했는데, 세천역은 그 과정에서 금정역(金井驛) 등과 함께 충청우도 금정도에 속하는 역으로 확립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시대 후기까지 금정도에 소속된 역으로 존속했으나,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은 조선초기 역의 설치 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역을 이설(移設)하고 역도를 재편할 것을 주장했는데, 세천역의 경우 홍주 동쪽 3리 지점으로 이설하고 금정도를 세천도(世川道)로 개칭하여 그 아래에 세천역을 포함한 18개 역을 소속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세천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홍주목 남쪽 1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에 비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원래 홍주목 동쪽 3리 지점에 있던 것을 남쪽 15리 지점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도 남쪽 15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위치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홍동면 원천리이다. 이 지역의 자연 마을 중 세천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조선시대 세천역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며, 혹은 역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역말이라 부르기도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호서읍지(湖西邑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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