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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3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 경상도 연읍(沿邑)의 세곡, 군량, 공작미 등을 보관하기 위하여 양산군에 설치한 창고.

개설

감동창은 조선후기 경상도 양산군 좌이면에 위치한 창고이다. 임진왜란 이후 수군방어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최현(崔晛)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감동창은 신설 초기에는 수군의 군량을 보관하고 배분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지만 이후 전세와 대동미 등 주요 부세가 이곳에 집적되면서 도내 최대의 물류창고로 부상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10년(광해군 2) 경상도 남해안의 수군진에 배속된 사수(射手)포수(砲手)의 급료를 보관하고, 배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양산군 좌이면 구법곡에 설치되었다. 감동창은 초기 도내에서 거두어들인 사포량(射砲糧)을 보관하는 군창(軍倉)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사포량은 사수와 포수의 급료로 징수하는 세미였다. 그러나 이후 전세와 대동세를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조창(漕倉)의 기능도 병행하였다.

조직 및 역할

감동창은 양산군에 있었으므로 양산군수의 관리를 받았다. 세부 구성원으로는 감관(監官)·색리(色吏)·수직군(守直軍)·순군(巡軍)이 있었다. 색리는 감동창의 실무자로 곡식을 수봉하고 배분하는 역할을 맡았고, 수직군은 창고에 보관된 창고를 지키는 인원이었으며, 순군은 도둑을 경계하기 위하여 밤에 창고 안팎을 순찰하던 병졸이었다. 감동창의 조직이 언제 완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세기 전반 감동창이 세곡을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감동창은 전후로 8칸씩 총 16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749년(영조 25)에 화재로 전소된 이후 좌기청(坐起廳) 3칸, 남고(南庫) 3칸, 서고(西庫) 4칸 등 총 10칸으로 줄어들었다.

변천

광해군대 선운의 재개로 낙동강 중하류 전세가 감동창에 적재되었고, 1634년(인조 12) 갑술양전 이후에는 전세 물류량이 대폭 늘어났다. 효종대 공목(公木)의 일부를 쌀로 바꾸어 왜관에 지급하면서 감동창에는 공작미가 보관되었다. 그리고 영남대동법의 실시로 대동미까지 거두어 보관함으로써, 감동창은 군창에서 조창의 기능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감동창의 기능이 증가하면서 속읍(屬邑)도 점차 늘어났다. 17세기 전반에는 김해·밀양·양산·의령·창녕·함안·현풍 등 7읍이 속읍이었으나 18세기 전반에는 영산이 추가되어, 총 8개 읍이 속읍이 되었다. 한편 대동법 이후 감동창에는 대동저치미가 본격적으로 비축되기 시작하였는데, 정부는 필요에 따라 이 재원을 호조와 선혜청의 경비, 왜관을 보수하는 비용, 진휼 재원 등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그러나 영조대 밀양·진주·창원에 삼조창(三漕倉)이 설치되면서 감동창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삼조창의 설치로 감동창의 속읍이 창원마산창(馬山倉)과 밀양삼랑창(三浪倉)으로 이속되었기 때문이다. 삼조창이 설치되면서 감동창은 조창 기능을 잃어버렸다. 동시에 군현에서 보내오던 사포량을 양산의 대동저치미로 대납하면서 군창의 기능마저 사라졌다. 1808년(순조 8)에는 금정산성(金井山城)이 수축되면서 감동창은 더욱 쇠퇴하였다. 이후 감동창은 명맥을 이어오다가 1867년(고종 4) 사창제(社倉制)가 시행되자 남사창(南社倉)으로 개칭되었고, 1907년(융희 1) 이전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주본존안(奏本存案)』
  • 『강좌집(江左集)』
  • 『인재집(訒齋集)』
  • 『양산군지(梁山郡誌)』
  • 崔完基, 『朝鮮後期 船運業史硏究』, 一潮閣, 1989.
  • 김덕진,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인천학연구』 7 ,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7.
  • 문광균, 「조선후기 양산 甘同倉의 설치와 변천」,『한국문화』 6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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