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漕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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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서울의 창고로 수송하기 위하여 해안이나 강가 등에 설치한 창고.

개설

고려시대부터 전세(田稅)의 수송은 조운(漕運)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를 위하여 전국에 13개의 조창이 설치되었다. 조선 개국 직후 조운제도가 정비되면서 고려의 조창을 정비하여 활용하였다. 이후 몇몇 창고가 통폐합되거나 신설되었는데, 15세기 말 완성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모두 9개의 조창이 운영되었다. 이후에도 몇몇 조창의 신설과 폐지가 반복되었다.

조창은 단순히 세곡을 운반하기 위한 보관 기능 외에도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우선 각 조창은 전세 수납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조선의 전세 수세 권역은 조창의 관할 구역과 일치하였다. 또 조창에서는 조운선을 확보하여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조창 인근에는 많은 물량이 집적되기 때문에 조창 지역은 자연스럽게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조창 인근의 상업 행위를 엄금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운의 원활한 운영은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조운이 차질 없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조운선이나 조졸 등의 확보와 더불어, 각 지역에서 수송할 전세를 수납·저장할 조창의 설치가 필요하였다. 조선은 개국 이후 조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려시대의 조창을 계승·활용하면서 조운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15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9개의 조창을 설치·운영하였으며, 이후 몇몇 조창이 신설되거나 폐지되면서 그 제도를 유지하였다.

내용

고려시대 정비되었던 조창은 경상도 지역의 통양창(通陽倉)·석두창(石頭倉), 전라도 지역의 해룡창(海龍倉)·장흥창(長興倉)·해릉창(海陵倉)·부용창(芙蓉倉)·안흥창(安興倉), 충청도 지역의 영풍창(永豊倉)·하양창(河陽倉)·덕흥창(德興倉), 황해도 지역의 안란창(安瀾倉), 강원도 지역의 흥원창(興元倉) 등 모두 13개였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증가하면서 해안 지역의 안정적인 조운로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말에는 조운이 거의 폐지되고 육운(陸運)이 활성화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도·전라도와 같이 해운에 의지하던 지역의 조창은 거의 활용되지 못하였다.

조선은 개국 직후부터 조운제도를 복구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우선 고려의 조창을 활용하여 조운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점차 새로운 조창을 신설하거나, 혹은 기존의 조창을 통폐합하면서 조창의 수를 조정하였다.

조창의 입지 조건 선정에는 다양한 요소가 고려되어야 했다. 우선은 해로나 수로에 가까운 곳이어야 했다. 또 조창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로와 해로가 항해에 용이해야 했다. 한편으로 조창은 단순히 보관 업무뿐 아니라 전세 수납 업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인근 지역과의 교통 편의도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각 조창에 소속된 고을의 세곡은 해당 조창에 수납되어야 했기 때문에 조창과의 거리가 너무 멀 경우 백성의 부담이 커질 우려가 높았다. 마지막으로는 조창에 집중되는 세곡의 양을 고려해야 했다. 물길을 안정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기후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는데, 이에 따라 일 년(1년) 중 조운이 가능한 기간 안에 세곡을 모두 운반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한 조창에서 운반해야 할 세곡의 양 역시 고려되어야 했다.

조선은 이러한 요소들을 감안하여 조창의 위치를 재조정하였다. 우선 경상도의 경우 국초에는 고려시대의 조창을 정비하여 활용하였다. 그러나 태조대와 태종대 수십 척의 경상도 조운선이 패몰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결국 경상도 전세는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에 납입하여 남한강 수운으로 운반하도록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도에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창이 설치되지 않았다. 경상도 전세는 일본과의 외교 비용으로 상당량이 사용되었고 서울로 운반되는 세곡의 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다. 이후 18세기 영조대에 이르러 마산창(馬山倉)과 가산창(駕山倉) 등을 신설하여 진주 등 22개 읍의 세곡을 조운하였다.

전라도의 경우는 덕성창(德成倉)과 영산창(榮山倉)의 2개 조창을 운영하다가, 이후 세조대 법성창(法聖倉)이 신설되어 3개의 조창이 운영되었다. 덕성창은 최초 명칭이 득성창(得成倉)이었는데 1428년(세종 10) 덕성창으로 개명되었다가 이후 성종 18년 이후 다시 득성창으로 되돌아갔다. 전라도의 세곡은 국가 운영의 가장 중요한 재원이었다. 반면, 해로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조운선 패몰의 위험이 큰 지역이기도 하였다. 특히 태안 앞의 안흥량(安興梁)은 물길이 험하기로 유명하였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 지역에 운하를 건설할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2년 11월 16일). 그러나 지형과 비용 문제로 운하 계획이 실행되지는 못하였고, 대신 조운선을 띄우는 시기를 조정하고 과적재에 대한 단속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운선의 패몰 사건은 종종 일어났으며 성종대에는 이들 조창 지역을 충청도 공세곶창(貢稅串倉) 등으로 옮길 것을 논의하였으나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중종대 이르러서는 세곡 침몰로 인해 영산창이 폐쇄되고 옥구에 군산창(群山倉)을 신설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충청도는 국초 여러 곳의 조창이 운영되다가 점차 남한강을 활용하는 충주의 가흥창과 해운을 활용하는 아산의 공세곶창 2곳으로 통합되어 갔다. 특히 가흥창은 태종대 이후 충청도 내륙 지역의 전세와 더불어 경상도 지역의 전세까지 아울러 수납·운송하는 곳이었다. 강원도는 북한강 수운을 활용하는 원주의 흥원창과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황해도는 예성강과 임진강 수운 등을 활용하였는데 배천의 금곡포창(金谷浦倉)과 강음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이 각각 설치·운영되었다. 이 밖에 평안도와 함경도·제주도의 경우 전세를 그 지역에서 사용하게 하였으므로 조창이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

각 조창은 소속된 고을의 전세를 수납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전세 수취의 권역은 조창의 업무 관장 범위와 일치하였다. 전세 수납에는 관찰사와 해당 지역의 수령들이 관여하였고, 각 수로별로 해운판관(海運判官)수운판관(水運判官)이 배치되어 업무를 관장하였다.

한편 조창은 명칭이 창(倉)이었으나 15세기까지는 창고 시설을 갖춘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일례로 충주의 가흥창은 16세기 중종대에 이르러서야 창고 건물을 갖추었다(『중종실록』 15년 윤8월 23일). 상황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수납된 세곡은 대부분 노적되어 있었고 이로 인한 손실분도 적지 않았다.

조창에는 세곡의 운송량에 비례하여 조운선이 배치되었다. 운송량이 많은 덕성창이나 공세곶창에는 약 60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었다. 해운과 수운에 따라 배의 적재량이 달랐기 때문에 수운을 활용하는 조창의 경우 실제 수송량에 비해 배속된 조운선이 많았다. 조운선은 8년에 한 번 수리하고, 6년 후 다시 수리하며 다시 6년 후에는 개조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조운선의 수명은 약 20년이었던 셈이다.

변천

조운제도는 15세기에는 비교적 원활히 운영되었으나 16세기 이후부터는 관선에 의한 조운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조운선의 확보와 유지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조졸(漕卒) 등의 인력 확보도 난항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6세기부터는 사선 조운(私船漕運)이 활발해졌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관선 조운(官船漕運)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조창의 경우 세곡 수납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선 조운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품화폐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세곡 대신 면포나 돈 등을 상납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조창이 관할하는 구역과 세곡의 양도 점차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최완기, 『조선후기선운업사연구 : 세곡운송을 중심으로』, 일조각, 1989.
  • 최완기, 「조선전기 조운시고-그 운영형태의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백산학보』 20, 197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