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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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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구진 |
한글표제 | 대구진 |
한자표제 | 大丘鎭 |
상위어 | 주진(州鎭), 병영(兵營), 순영(巡營) |
하위어 | 제진(諸鎭), 속읍(屬邑) |
동의어 | 거진(巨鎭), 대구진관(大丘鎭管), 대구진영(大丘鎭營), 대구토포영(大丘討捕營) |
관련어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대구영장(大丘營將), 대구토포사(大丘討捕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衛), 순찰사(巡察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구진(大丘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23년 5월 10일 |
조선시대 경상도 대구부에 설치한 육군 거진으로, 전기에는 대구진관, 후기에는 대구진영으로도 불림.
개설
대구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될 때 경상도 육군의 거진(巨鎭)으로 설치하였다. 대구진은 대구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평시에는 제진(諸鎭)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주도하였고, 유사시에는 대구진관(大邱鎭管)을 중심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과 진관체제(鎭管體制)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정부가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면서 대구진영(大邱鎭營)도 설치하였다. 대구진영의 군병은 『여지도서』에 의하면 6,546명이었다. 대구진영은 속읍(屬邑) 군병의 훈련과 점검은 물론, 민란이나 변란을 진압하였고 도적 체포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대구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대구진은 조선전기에 대구진관으로,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설립되었다. 진관체제는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군사기지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대구진영은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조선후기에 설립하였다. 즉 정부는 명나라의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을 육성하고,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었다. 영장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게 하는 등,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편하면서 대구진영도 설치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의 거진 대구진은 대구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밀양, 청도, 경산, 하양, 인동, 현풍, 의흥, 신녕, 영산, 창녕, 대구’ 등 제진의 훈련과 점검 및 유사시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대구진관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경상도 중영(中營)인 대구진영은, 조선전기의 거진인 대구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대구진영의 속읍은 ‘대구, 밀양, 인동, 청도, 경산, 영산, 현풍, 창녕, 자인’이고,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공해(公廨)로는 ‘무계당(武戒堂), 군관청, 도훈도청, 영리청, 진리청, 소동방, 사령방, 군뢰방’ 등이 있었다.
군병은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7명, 지구관 1명, 기고관 1명, 초관 50명, 기패관 97명, 영장표하군 109명, 장관표하군 657명, 기수군 106명, 취고수 37명, 당보군 33명, 속오마군 877명, 보군 3,830명, 복마군 407명, 화병 329명’ 등 총 6,546명이었다.
대구진영은 영장순력(營將巡歷)을 통해 속읍 속오군 등의 훈련과 무기·복장 상태를 점검하였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아울러 1665년(현종 6) 대구영장이 토포사를 겸하면서 대구진영은 토포영이 되었다. 1886년(고종 23) 관장(官長)의 인장과 부신(符信)을 빼앗은 도적을 잡았고(『고종실록』 23년 5월 10일), 1887년 무덤을 파헤치고 불을 지른 도적을 진교나 기찰포교가 체포하는 등 치안을 맡은 기록이 있다.
변천
조선전기에는 대구진관이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진영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대구진영으로 바뀌었다. 대구진영의 속읍은, 대구진관의 11개에서 ‘하양, 의흥, 신녕’이 제외되는 대신 ‘자인’이 추가됨으로써 9개로 줄었다. 1654년(효종 5) 이후 대구영장의 파견이 확정됨으로써 대구부사의 속읍 군사 지휘권이 대구영장에게 넘어갔다. 1665년부터는 대구진영이 토포영도 겸하였다.
대구진영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호남읍지(湖南邑誌)』
- 『군국총목(軍國摠目)』
- 『양역실총(良役實總)』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서태원,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 『호서사학』4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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