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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성현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에 위치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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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청단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남도 장연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개설'''==
  
금동역(金洞驛)은 조선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성현도(省峴道)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경상도 밀양도호부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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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역(金洞驛)은 고려시대에는 절령도(岊嶺道)에 소속된 11개 속역 가운데 하나였다. 1426년(세종 26) 황해도 장연현 당부(唐釜)과 [[영강(永康)]]을 통합하여 영강진(永康鎭)이라 하였고, 영강은 사신이 오가는 중앙 지점이므로 그 관사를 철폐하지 않고 금동역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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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청단도(靑丹道)]]를 구성하는 역 하나가 되었다. 황해도 장연현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전기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면서 역참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때까지 금동역은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금동역은 이동음역(伊冬音驛)이라는 명칭으로 설치되어 성현역 등과 함께 성현도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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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절령도(岊嶺道)에 속한 11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황해도 재령군에 해당하는 안주(安州)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1061년(고려 문종 15)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전기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청단도에 소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금동역에는 [[역리(驛吏)]] 240명, 역노(驛奴) 13명, 역비(驛婢) 8명과 대마(大馬) 1필,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9필 등 총 12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경상도 지역의 역도인 성현도의 속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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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금동역에는 [[역리(驛吏)]] 3명, 역노(驛奴) 13명과 역마 1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황해도 지역의 역도인 청단도의 속역이었다.
  
 
=='''변천'''==
 
=='''변천'''==
  
1460년(세조 6)에 경기도와 하삼도(下三道)의 역을 정비하였는데, 역로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지 못하는 등 각종 폐단이 생겼기 때문에 [[역승(驛丞)]]을 없애고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여러 역도를 아울러 관리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성현도에 소속되었던 금동역은 [[황산도(黃山道)]]의 속역과 성현도의 속역이 황산도로 통합됨에 따라 황산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혁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였는데, 이때 성현도가 복구되면서 금동역은 다시 성현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성현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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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청단역‧금곡역(金谷驛)·심동역(深洞驛)[[망정역(望汀驛)]]‧금강역(金剛驛)·문라역(文羅驛)‧남산역(南山驛)‧[[신행역(新行驛)]][[유안역(維安驛)]]과 함께 청단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청단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밀양도호부 조에 따르면, 금동역은 밀양도호부 남쪽 23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연금리 외금마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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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장연현 조에 따르면, 금동역은 장연 고을 동쪽 45리 지점인 영강현 옛터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장연군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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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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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0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청단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남도 장연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금동역(金洞驛)은 고려시대에는 절령도(岊嶺道)에 소속된 11개 속역 가운데 하나였다. 1426년(세종 26) 황해도 장연현 당부(唐釜)과 영강(永康)을 통합하여 영강진(永康鎭)이라 하였고, 영강은 사신이 오가는 중앙 지점이므로 그 관사를 철폐하지 않고 금동역이라 하였다.

이후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청단도(靑丹道)를 구성하는 역 중 하나가 되었다. 황해도 장연현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절령도(岊嶺道)에 속한 11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황해도 재령군에 해당하는 안주(安州)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1061년(고려 문종 15)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전기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청단도에 소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금동역에는 역리(驛吏) 3명, 역노(驛奴) 13명과 역마 1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황해도 지역의 역도인 청단도의 속역이었다.

변천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청단역‧금곡역(金谷驛)·심동역(深洞驛)‧망정역(望汀驛)‧금강역(金剛驛)·문라역(文羅驛)‧남산역(南山驛)‧신행역(新行驛)유안역(維安驛)과 함께 청단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청단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장연현 조에 따르면, 금동역은 장연 고을 동쪽 45리 지점인 영강현 옛터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남도 장연군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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