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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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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훈련별대 |
한글표제 | 훈련별대 |
한자표제 | 訓鍊別隊 |
관련어 | 금위영(禁衛營), 번상병(番上兵), 훈련도감(訓鍊都監)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훈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훈련별대(訓鍊別隊)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실록』 10년 1월 17일, 『현종실록』 10년 7월 23일, 『숙종실록』 8년 3월 16일 |
17세기 후반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소속되었던 번상병(番上兵).
개설
임진왜란 과정에서 설립된 훈련도감은 왕을 호위하고 수도를 지키는 주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급료를 받는 병사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재정 부담이 심각했다. 효종이 즉위한 뒤 북벌을 목표로 군비 확장을 도모했으나 부담이 커짐으로써 효종이 죽은 뒤 감축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급료병(給料兵) 대신 번상병제(番上兵制)로 운영되는 별도의 부대를 만드는 방안이 강구되면서 훈련별대(訓練別隊)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군비 축소와, 하나의 조직에 다른 성격의 병사가 병존하는 데 따른 문제로 훈련별대와 정초군(精抄軍)을 합쳐 금위영(禁衛營)을 설치하였다.
담당 직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전기 중앙군의 핵심 조직이었던 오위는 완전히 허수화되었다. 이에 오위를 대신하는 조직으로 훈련도감을 임진왜란 중에 개설하여 확장하였다. 그 결과 훈련도감이 궁궐 경호와 도성 방위를 담당하는 중추적인 기구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만회한다는 이유로 효종은 즉위 직후부터 군비 확충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주된 계획의 하나가 훈련도감의 군병 숫자를 1만 명 선으로 증가시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까지 훈련도감의 군병은 모두 급료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유지비가 투입되어야 했으며, 그 결과 국가 재정은 심각한 압박을 받았다. 더구나 비슷한 성격의 어영청(御營廳)까지 인조반정 이후 신설되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강도가 더 심했다. 마침내 효종 사후에 군병 숫자 감축론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감축론의 주요 핵심은 승호(陞戶) 중지와 군병 수를 5,000명 선으로 고정하는 것, 그리고 도감에 배정된 둔전(屯田)을 없애는 것이었다. 승호는 중앙과 지방에서 사노비나 공노비, 백정 등의 천민을 양민으로 승격시켜 훈련도감의 포수 정군(正軍)에 소속시키던 제도인데, 이를 중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군비 확장을 주관하던 이완(李浣)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논쟁만 계속되었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자 서인(西人)의 강력한 지도자 송시열(宋時烈)이 절충론을 제시하였다. 훈련도감을 존속시키되 증액을 중지하고, 이후로는 결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않음으로써 자연히 도태시키자는 것이었다. 또한 전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경비가 비교적 적게 드는 어영청 같은 군영을 대신 만들어 불식시키자고 주장하였다(『현종실록』 10년 1월 17일).
이 제안이 왕의 측근이었던 남인(南人)의 허적(許積)과 유혁연(柳赫然) 등의 지지를 얻어 실행에 옮겨졌다. 하지만 그들의 실제 계획은 번상병제로 운영되는 별도의 부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왕의 승인을 얻어 각 도에서 찾아내 파악한, 국역(國役)에 나가지 않는 장정, 즉 한정(閑丁) 54,000여 명 가운데 유직자나 유역인 및 공적·사적 천민을 제외한 10,158명을 간추렸다. 다시 여기에서 서·북 양도(兩道) 출신자를 제외하고 남은 6,665명을 새로운 부대에 소속시킬 인원으로 확정하였다. 이들은 어영청의 예에 따라 13개 번으로 나뉘어 매 번에 521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1669년(현종 10)에 정식으로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훈련별대로 이름 붙었다(『현종실록』 10년 7월 23일). 훈련별대도 궁중에서 교대하지 않고 오래 근무하는 장번(長番) 급료병이었던 도감군과 마찬가지로 왕의 호위와 수도 방위를 주로 담당하였으나, 교대로 번상해야 한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변천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패퇴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전과 마찬가지로 도감 변통론(變通論)이 또다시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도감군을 감축하고 중앙군을 번상병제로 전환하자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더불어 훈련도감의 이원성, 즉 급료병과 번상병이 한 조직에서 병존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같은 서인 계열이었음에도 외척인 김석주(金錫冑) 등은 왕의 시위가 취약해진다는 이유로 그에 반대했다. 이번에는 훈련별대가 쓸모없는 군대라며 그것을 혁파하여 군액을 감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신들에게서 나왔다.
드디어 김석주의 주도로 개편 작업이 시작되면서 도감군의 감축과 번상병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수용하였다. 일단 훈련도감 군액 5,707명 중 707명을 감축하여 번상병제로 운영되는 훈련별대로 보냈다(『숙종실록』 8년 3월 16일). 그리고 이들을 정초군과 합하여 정군 14,098명, 보인(保人) 78,000명 규모의 금위영을 1682년(숙종 8)에 설치하였다. 이로써 훈련별대의 병력과 직무가 금위영으로 완전히 이관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 혜안, 200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육군본부, 1977.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최효식, 『조선후기 군제사 연구』, 신서원, 1995.
- 최효식, 「용호영에 대하여」, 『경주사학』 4, 경주사학회,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