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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5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장악원(掌樂院) 소속으로 궁중의 연례(宴禮)나 제례(祭禮) 의식에서 노래를 담당하던 남성 전문 음악인.

개설

조선시대까지 왕립 음악 기관에서 음악 중 주로 노래를 담당하던 남성 전문 음악인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초기에는 전악서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458년(세조 4) 이후 아악서와 함께 장악서에 통합된 이후에는 우방(右坊)에 소속되었다. 노래를 담당하던 이들 가운데 아이들을 가동(歌童)이라 하였으며, 성인은 가공(歌工)이라 칭하였다. 역대 아악이나 속악의 진설도설에 ‘가(歌)’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곧 가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담당 직무

연례나 제례 의식의 등가(登歌)헌가(軒架)에서 노래를 담당하였다. 왕의 거둥 때 연주하는 고취악(鼓吹樂)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부터 가공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이 시대에는 왕이 친히 제사에 참석할 경우에 등가에 4명, 헌가에 12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왕이 제사에 참석하지 않고 신하가 대신 참석할 경우에는 가공의 수가 감소된다. 조선초기인 세종 때까지 제례에서 노래를 담당하는 악공으로 문헌에 나타나고 있으며, 등가에서 가공 24명이 공연하기도 했다. 또한 세종 때에는 가공의 증원이 건의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18일). 성종 때부터는 가공 대신 가(歌)라고만 기록되기도 했다. 정조 때 “가공이 옛날에는 많고 지금은 적다.”고 했으니, 가공은 조선후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

가공은 당대 음악 문화의 주도자라 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관청에 소속되어 주로 궁중의 의례나 사신의 접대 등 국가적인 행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들의 소임은 주로 음악 연주이기 때문에, 노래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에 사용했던 악기나 악곡에 정통하여 즉석에서 어떤 곡이라도 반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새로운 왕조가 건립될 때 이전 음악을 전승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담당자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또한 이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공연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때로는 궁중의 쓰임새에 맞도록 음악을 편집하고 개작하였다. 이를 통해 민간의 음악을 궁중에 전파하고, 역으로 궁중의 음악을 민간의 연희 공간에 전해주는 역할까지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로 인하여 제한적이나마 당시 음악 문화를 다층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김수경, 「고려말 악공·기녀의 위상과 음악사적 의의」, 『한국문화연구』 15,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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