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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5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에 전쟁·반란을 대비하고, 왕의 어가(御駕)를 호위하는 임무 등을 위해 어영청 등에 설치한 병종.

개설

별초무사가 언제 처음으로 설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총융청 별초무사가 1629년(인조 7) 12월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1629년 이전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어영청 별초무사는 총융청과 비슷한 시기에 설치되어 후금(後金)과의 전쟁을 대비하고 어가의 호위 등도 담당하였는데, 환도(還都)한 후 별초무사는 활쏘기 시험을 통하여 활이나 목면(木棉) 등을 상으로 받았다. 하지만 어영청 별초무사는 1745년(영조 21)에 이르면 정원 60명 중 50명이 가전별초로 이속되었고, 남은 10명 중 2명은 병방(兵房)·호방(戶房), 그리고 8명은 앞으로 가전별초의 재원으로 활용하도록 함으로써 어영청 별초무사는 명목만 남게 되었다. 그 밖에 1728년 무신란(戊申亂)을 겪은 후 공홍도 감영에, 그리고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후 전라도 순천부와 삼군부(三軍府) 등에도 별초무사가 설치되었다.

담당 직무

별초무사는 전쟁·반란을 대비하고, 왕이 행차할 때 어가를 호위하는 임무 등을 담당하였다. 특히 어영청 별초무사는 전쟁을 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의 행차 때 왕이 타는 연(輦)을 호위하는 역할 등도 수행하였다.

우선 어영청 별초무사의 전쟁과 관련된 기능은, 1636년 비변사가 어영청의 별초무사 50명과 훈련도감 마군(馬軍) 100명을 부원수신경원에게 보내어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자고 제의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어영청 별초무사 49명은 현종이 대비를 모시고 온양온천에 거둥한 1666년(현종 7) 연을 호위하였으며(『현종실록』7년 3월 26일), 교단(郊壇)이나 사묘(私廟) 등에 거둥할 때에도 별초무사는 가후금군 등과 함께 왕을 호위하였다. 어가를 수행한 별초무사에게는 1665년의 경우, 도성으로 돌아온 후 5일째에 음식을 주어 위로하고, 6일째에 활쏘기를 시험하여 활·목면(木綿) 등을 상으로 주었다. 물론 봄·가을의 활쏘기 시험에서도 목면을 상으로 내리거나 품계를 올려 주거나 변장(邊將)에 제수하거나 또는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곧 직부전시(直赴殿試) 등의 혜택을 주었지만, 두 번 계속해서 불합격하면 별초무사에서 쫓겨났다.

그 밖에 공홍도 감영의 별초무사는 1728년 무신란을 겪은 후 공홍도감사(公洪道監司) 휘하에 항상 대기하는 장교를 둠으로써 변란에 대비하는 역할을, 그리고 전라도 순천부와 삼군부의 별초무사는 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후 전쟁에 대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변천

별초무사 중 어영청 별초무사는 이서(李曙)가 대장일 때 날래고 건장한 무사를 뽑아 창설하였다.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 4월 별초무사 50명의 존재가 확인되는데(『인조실록』14년 4월 6일), 병자호란 후인 1637년 11월 총융청 별초무사 53명이 어영청으로 이속되고 금군에서 녹봉을 받는 73명이 포함되어 정원이 176명으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1652년 73명이 금군 내삼청에 소속되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별초무사는 축소되어 경종대 무렵에는 60명이 되었다. 더욱이 경종대부터 어영청 별초무사 가운데 가전별초를 만들고, 1745년(영조 21) 남은 별초무사 30명 중에서 20명은 별초무사로, 2명은 병방과 호방으로, 8명은 결원이 생길 경우 채우지 않고 급료로 지급하는 쌀인 요미(料米)를 가전별초의 활쏘기 시험 때 제공하는 재원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결국 어영청 별초무사는 명목만 남고, 가전별초를 의미하게 되었다.

한편 총융청 별초무사 53명은 1637년 어영청 별초무사에 이속되었고, 다른 별초무사는 소속처인 삼군부가 1880년, 어영청이 1894년, 지방군이 1895년에 혁파됨에 따라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신명호, 「조선 후기 국왕 행행 시 국정 운영 체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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