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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4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 각 군영의 지휘나 명령 전달에 쓰이는 대기(大旗)를 가진 기수(旗手).

개설

조선후기에는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할 때 각종 깃발과 악기를 사용하여 명령을 전달하였는데, 대기, 일명 오방대기(五方大旗)는 주장(主將)이 휘하의 동·서·남·북·중 다섯 방위의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이를 위해 주요 군영이나 감영, 병영 등에는 다수의 대기수가 배치되어 있었다.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반차도(班次圖) 등에서는 구체적으로 주작기(朱雀旗), 청룡기(靑龍旗), 백호기(白虎旗), 현무기(玄武旗), 등사기(騰蛇旗)로 표기되어 있는 깃발을 든 대기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담당 직무

대기수의 임무는 깃발을 들고 행진 시에는 주장의 앞에서 대열을 이끌며, 전투 시에는 주장이 휘하의 부대에 명령을 전달하고자 하면 이에 따라 흔드는 등의 동작으로 명령을 전하는 것이다. 대기수의 복장은 전건(戰巾)을 쓰며 칼을 차고 깃발을 받든다. 이 깃발의 구체적인 규격은 사방이 5척(尺)이며 깃대의 길이는 1장(丈) 5척이고 중앙에는 용, 호랑이, 새, 뱀, 거북을 그려 넣는다. 깃발의 바탕색은 해당 방위의 색깔을 따르도록 하였다. 끈의 머리에는 붉은 실로 꿩 꼬리[雉尾]를 달았다.

변천

대기수의 규모는 군영별로 차이가 있었는데 19세기 초 『만기요람』에 의하면, 어영청(御營廳)에 117명, 훈련도감에 166명, 용호영에 33명 등이 있었다. 지방군에서도 대기수의 존재가 적지 않게 확인되는데, 1624년(인조 2) 11월 경기도의 군병으로 총융청을 개편할 때 천총(千摠) 등에 대기수를 함께 편성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2년 11월 9일). 그 외에도 19세기 중반인 1873년(고종 10) 전후로 지방에 다수의 포수(砲手)를 설치할 때 대기수를 함께 편성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종실록』10년 12월 2일).

대기수는 1880년대 초 교련병대(敎鍊兵隊) 등 근대식 체제의 군대가 창설되면서 그 존재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기효신서(紀效新書)』
  •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
  • 『만기요람(萬機要覽)』
  •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 이숙희, 『조선 후기 군영악대-취고수·세악수·내취』, 태학사, 2007.
  • 노영구, 「조선 후기 반차도(班次圖)에 보이는 군사용 깃발」, 『문헌과 해석』2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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