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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4 기준 최신판



정식 관직에 제수하기 전에 임시로 임명한 관직.

개설

권지(權知)의 ‘권(權)’은 ‘섭(攝)’과 같은 의미로, 일시적으로 관직을 위임받는 권설직(權設職)을 말한다. 조선조에서 권지라는 직함은 여러 경우에 사용되었는데, 먼저 정해진 관서의 인원 이외에 추가로 실무적인 관원이 필요할 경우 임시로 권지라는 직함으로 차출하였다. 또는 문과 급제자를 승문원을 비롯해 몇몇 관서에 분관(分館)한 경우, 이들에게 권지라는 직함을 부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용례는 실무 관원을 차출하여 권지의 직함을 주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고 주로 분관되어 권지라는 직함을 받는 경우로 집중되었다. 권지직은 「권지승문원정자」의 예와 같이 실직(實職)인 승문원(承文院) 정자의 앞에 적기되어 제수되었다.

담당 직무

권지는 실무 인원이 필요한 경우에 차출되었다. 1414년(태종 14) 7월 사재감(司宰監)이나 예빈시(禮賓寺)의 경우를 본받아 군자감(軍資監)에 문자와 계산에 능통하고 밝은 자를 소속시켜 권지직장(權知直長)을 설치하였다(『태종실록』 14년 7월 3일). 1423년(세종 5) 1월에는 제용감의 업무가 바쁘다고 하여 권지직장 10명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5년 1월 26일). 임시로 권지의 직함을 띠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업무는 관청의 일상적인 업무와 동일하였다. 예를 들어 예빈시 소속 권지직장은 예빈시에서 담당하는 양이나 돼지 등의 사육을 감독하였다(『세종실록』 3년 1월 22일).

한편 문과와 무과 급제자에게도 권지직을 제수하였다. 문과 급제자 중 바로 실직에 제수되는 갑과 급제자 3인을 제외한 을과와 병과 급제자는 권지로서 승문원·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예문관(藝文館)에 분관되었다. 무과의 경우도 갑과 급제자는 바로 실직에 제수되었지만 을과와 병과 급제자는 권지로서 별시위(別侍衛)·훈련원(訓鍊院)에 분관되었다. 승문원이나 성균관·교서관의 분관은 급제자를 발표하는 방방(放榜) 이후에 이루어졌다. 먼저 승문원에서 분관 대상자를 이조(吏曹)에 통보하면, 이조에서는 나머지 인원을 대상으로 성균관이나 교서관에 분관하였다. 분관할 때에는 일정한 기준이 있었는데, 성균관은 노성(老成)하고 덕망이 있는 자를, 승문원과 교서관에는 나이가 젊고 글씨를 잘 쓰며 총민한 자를 각각 배치하였다.

삼관에 분관된 후에는 권지로 차출하였다가 실직에 제수하였다. 이때 두 가지 진출 경로가 있는데, 첫째는 분관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승진하면서 권지라는 직함을 띠고 해당 관서의 실직을 받는 경우이다. 둘째는 다른 관서의 참하 관원으로 차출되는 경우이다. 삼관의 권지는 각 군현에 파견되어 생도들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7년 6월 16일).

예문관의 분관은 이들 삼관과는 차이가 있는데, 우선 대상부터 문과 급제자를 비롯해 현직 8품 관원이 포함되었다. 평균 1년에 1회 정도, 매회 2명 이상의 분관자를 배출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초에는 권지라는 직함이 중국에서 책봉을 받기 전의 왕이나(『태조실록』 1년 8월 29일), 서리의 편제(『태조실록』 1년 7월 28일), 토관직(土官職)(『태종실록』 7년 9월 1일)을 비롯해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이나(『태종실록』 8년 12월 1일) 의학습독관(醫學習讀官)(『태종실록』 9년 2월 7일) 등에게도 사용되었다.

변천

권지와 같이 임시로 관직에 임용하는 제도는 중국에서 한(漢)나라 이후부터 시작되었고, 우리의 경우에도 고려시대부터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발표된 문무 관제에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비롯해 문하부(門下府) 소속 서리의 일부를 권지로 편성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권지라는 직함이 사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 관원들에게 사용되던 권지라는 직함의 사용은 사라져가고 대개는 문·무과 급제자를 대상으로 분관을 실시하고 이들에게 주는 직함으로 권지를 사용하였다.

급제자를 대상으로 한 분관은 급제자 전원을 바로 실직에 제수할 수 없었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관은 비록 임시직이었지만, 승문원 등에 분관됨으로써 향후 핵심 관서의 참하관(參下官)으로 진출할 수 있는 첩경이 되었다. 승문원·성균관·교서관 등의 분관은 16세기 이후가 되면 승문원에 분관된 급제자가 다른 관서에 비해 핵심 관직으로 진출하는 데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17세기 이후에는 서얼과 서북 출신들이 승문원 분관에서 배제되었다.

이처럼 17세기 이후에는 특히 분관에 특정 정치 세력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분관을 둘러싸고 여러 갈등이 생겨나 분관이 지체되는 양상이 등장하였다. 이에 영조대에는 분관이 지체될 경우 관련자를 처벌하는 한편 이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였다(『영조실록』 10년 4월 3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兪鹿年 編, 『中國官制大辭典』, 흑룡강인민출판사, 1992.
  • 원창애, 「조선시대 예문관 분관 실태와 한림의 관직 승진 양상」, 『조선시대사학보』 57, 2011.
  • 차미희, 「조선 후기 문과 급제자의 분관」, 『한국사학보』 6,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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