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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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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소신지보 |
한글표제 | 소신지보 |
한자표제 | 昭信之寶 |
상위어 | 국새(國璽), 보인(寶印), 새보(璽寶), 어보(御寶) |
동의어 | 소신보(昭信寶) |
관련어 | 과거지인(科擧之印), 국왕신보(國王信寶), 국왕행보(國王行寶), 선사지기(宣賜之記),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지보(諭書之寶)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세종~미상 |
집필자 | 성인근 |
용도 | 국왕 문서 |
재질 | 황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소신지보(昭信之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5년 10월 2일 |
조선시대 사신(事神), 사유(赦宥), 공거(貢擧) 관련 나랏일에 사용한 행정용 어보.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실 인사의 위호(位號)를 나타낸 어보 이외에 각종 국왕 문서와 서적 반사(頒賜)를 위한 인장을 사용하였다. 명으로부터 책봉과 함께 받은 국새는 모든 나랏일에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이는 우선 금제(金製)이므로 쉽게 닳아 인문(印文)이 만환(漫漶)될 우려가 있었고, 국내용 문서에 ‘조선국왕’이라 새긴 보문이 격에 맞지 않음이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세종대부터 중원의 제도를 모방하여 국새를 대체할 국왕행보(國王行寶)와 국왕신보(國王信寶)를 제작하여 국왕 문서에 사용함으로써 조선의 국왕 문서용 어보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세종은 기존에 없었던 어보를 주조하여 국왕 문서와 서적 반사에 사용하도록 하여, 세종 당대에 국왕행보·국왕신보·시명지보(施命之寶)·소신지보(昭信之寶)·과거지인(科擧之印)·유서지보(諭書之寶)·선사지기(宣賜之記) 등 7개 어보를 주조하였다. 이후에 제작된 어보 대부분이 이들의 용도와 중복되므로 세종대에 이미 국왕 문서와 서적 반사용 어보가 완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를 통틀어 국왕 문서와 서적 반사용 어보는 모두 15종이 확인되었는데, 필요에 따라 문구를 바꾸거나 유실에 따른 개주가 있었다.
연원 및 변천
1433년(세종 15) 3월 2일 새로 주조하여 명으로부터 받은 국새 대용으로 사용하던 국왕신보와 국왕행보는 의정부의 권고로 10년 만에 폐기하게 되었다. 1443년(세종 25) 의정부에서는 예조의 첩정에 의하여 국왕신보와 국왕행보는 국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보문에 ‘국왕’이라 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어보 제작을 권고한 것이다.
세종은 이 안건을 받아들여 1433년 제작한 이래 10년간 사용한 국왕신보와 국왕행보를 폐기하고, 새로운 어보인 시명지보와 소신지보를 제작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5년 10월 2일) 이때 시권(詩卷)과 홍패·백패 등 과거 관련 문건에 사용할 과거지인도 함께 제작하였다. ‘시명(施命)’은 『주역(周易)』의 ‘명고(命誥)를 사방에 베푼다[施命誥四方]’는 구절에서 땄고, ‘소신(昭信)’은 『국어(國語)』의 ‘말로써 믿음을 밝힌다[言以昭信]’는 구절에서 취하였다. 국왕신보를 폐기하고 이를 대체할 어보를 제작하자는 예조의 건의 이후 1445년(세종 27) 4월 16일 소신지보가 완성되었는데, 사용 사례가 드물고 언제까지 사용하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영조대까지 어가 행렬에 봉송되었고 20세기 초까지 창경궁 주합루에 보관되었다.
소신지보가 찍힌 사례로는 양산이씨종손가소장고문서(梁山李氏宗孫家所藏古文書) 가운데 하나인 「이징석사패교지」가 있다. 양산이씨종손가소장고문서는 양산이씨의 시조 이전생(李全生)을 1398년(태조 7)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로 임명하는 사령서인 왕지 1점, 이징석 관련 문서 왕지 4점, 유서 1점, 토지와 노비를 내리는 사패교지 3점, 그리고 이징석이 죽은 후 세조가 내린 사재문 등이 있다. 이 문서들은 조선전기의 각종 문서를 고루 갖추고 있어 당시 고문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가운데 「이징석사패교지」는 좌익공신에 책봉된 이징석에게 노비 8명을 하사한 사패교지로, 조선전기 소신지보의 안보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형태
소신지보의 재질은 황금이며, 서체는 13첩의 첩전(疊篆)으로 같은 시기에 제작한 시명지보와 첩수가 같다. 보문을 쓴 사람은 강희안(姜希顔)으로 조선전기 국왕 문서용 어보의 전서자를 확인할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인장과 비액(碑額)에 쓰이는 서체인 전서에 능숙한 사람이 적어 국가적 차원에서 이를 양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강희안은 전서·예서·팔분에 모두 정통한 경지를 이루어 삼절이라 추앙되었고, 그 수준은 당시 조정에서 독보적이었다. 소신지보는 조선전기 보문의 서자가 드러난 유일한 사례로 강희안의 전문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 『국어(國語)』
- 정구복, 「조선조의 고신(사령장) 검토」, 『고문서연구』9,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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