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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1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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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방패 |
한글표제 | 방패 |
한자표제 | 防牌 |
상위어 | 공병제(公兵制), 부병(府兵) |
동의어 | 팽배(彭排) |
관련어 | 갑사(甲士), 육십(六十), 대졸(隊卒), 호분위(虎賁衛) |
분야 | 정치/군사·국방/병기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방패(防牌)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 |
방패(防牌)라는 무기를 갖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병종(兵種).
내용
방패라는 병종이 만들어진 것은 1415년(태종 15)의 일이었다. 태종대에는 사병(私兵)이 혁파되는 등 공병제(公兵制)가 확립됨과 아울러 부병(府兵)의 이원화(二元化)가 진행되었다. 고려와 조선초기의 중앙군인 부병은 정5품 중랑장(中郞將), 정6품 낭장(郎將), 정7품 별장(別將), 정8품 산원(散員), 정9품 교위(校尉), 품외(品外) 대정(隊正)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태종대에 이르러 중랑장, 낭장, 별장, 산원 등 5~8품의 상층 군인들은 갑사(甲士)로 편제되고, 교위·대정 등 하층 군인들은 방패라는 병종으로 새로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교위, 대정 등은 각 령(領)당 그 정원이 각각 20명, 40명이었기 때문에 합쳐서 육십(六十)이라고 불렀는데 고려 때부터 각종 역사(役事)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1415년에 이들을 전투 병종화하기 위해 사역동원을 금지하고 건장한 자 1,000명을 뽑아 방패를 주 무기로 하는 ‘방패’라는 명칭의 병종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의 진법에 따르면 방패군은 왼손에 방패,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기병대의 앞에 위치하거나, 백병전에서 최선봉이 되어 앞서가는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중요한 병종으로 평가받아 녹을 받았으며 하번(下番) 때도 잡역을 면제받는 등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세조 때에 그 명칭이 팽배(彭排)로 바뀌면서 대졸(隊卒)과 함께 대표적인 사역군이 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5,000명 정원에 1,000명이 5교대로 4개월씩 근무했다. 이들을 위한 체아직은 종8품 체아직 20명, 잡직 정9품 80명, 종9품 920명을 두었다. 1,080일을 근무하면 품계를 올려주었다. 다른 병종이 150일 이내인 점에 비하면 상당히 길었다. 거관(去官)하는 자는 종8품 실직(實職)을 주었다. 계속 근무를 원하는 자는 290일을 근무하며 종6품에서 그치게 했다. 보(保)로 2정에게 1보를 지급했다. 5위에서는 1469년(예종 1) 5월 조치에 따라 5위 가운데 우위(右衛)인 호분위(虎賁衛)에 속하게 되었다.
용례
防牌 禦敵先鋒 其用甚緊 國初倣古制 旣設馬兵甲士 歲乙未 用隊長隊副 爲防牌 以護軍李順茂爲訓導 敎其進退之節 馬步二兵 迭爲掎角 不可與他兵泛論 近來防牌 役於營繕 本業將廢(『문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
참고문헌
-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韓國硏究院, 1983.
- 金鍾洙, 「朝鮮初期 府兵制의 改編」, 『歷史敎育』77집,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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