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성(鉤陳星)"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0:0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구진성 |
한글표제 | 구진성 |
한자표제 | 鉤陳星 |
관련어 | 북극성(北極星) |
분야 | 문화/과학/천문 |
유형 | 자연(현상) |
집필자 | 김일권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진성(鉤陳星)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 9년 11월 16일, 『성종실록』 21년 7월 16일, 『철종실록』 10년 8월 23일 |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 갈고리 모양의 여섯 별 중 하나.
개설
6개의 별로 이루어진 구진성은 구진 6성이라고도 하는데, 그중 가장 밝은 구진대성(鉤陳大星)은 오늘날 동양 천문도의 북극성(polaris)에 해당하며, 서양식 별자리로는 작은곰자리의 α별에 대응된다. 구진 6성은 의미상 황후와 후궁으로 구성된 별자리, 천자를 호위하는 호위군 혹은 군진을 지휘하는 여섯 장군 별자리로 인식되었다. 또한 천자의 근신인 삼공(三公)과 삼사(三師)를 담당하는 만물의 어머니 별자리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구진성은 별의 형태가 갈고리가 펼쳐진 듯한 모양이라는 뜻에서 구진(鉤陳)이라 이름 하였는데, 구진은 ‘句陳’으로 쓰기도 하였다. 조선초기에 천문학 교과서로 사용되기도 한 『천문류초(天文類抄)』에서는, 구진성을 대제(大帝) 곧 천제(天帝)의 정비(正妃)이자, 천제가 거처하는 궁궐로 묘사하였다. 6개의 별 중 가장 밝은 제1성이 원비(元妃)이고, 나머지는 처첩(妻妾)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구진성을 황후 별자리로 보았던 까닭에 점성(占星)에서는, 별의 색깔이 너무 밝지 않은 것이 좋다고 하였고, 만약 밝게 보이면 여주(女主) 곧 황후의 행실이 나빠진다고 보았다. 또 별이 성하면 보필하는 신하가 강해지고 왕이 간언을 듣지 않으며, 아첨하는 무리가 가까이 있으면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편 구진성은 군진의 중심인 여섯 장군을 주관하고, 천제의 측근인 삼공(三公)과 삼사(三師)를 맡아 만물의 어머니가 된다고 인식하기도 하였다.
구진 제1성 (大星) α UMi 2.02
구진 제2성 (柄第3星) δ UMi 4.36
구진 제3성 (柄第2星) ε UMi 4.23
구진 제4성 (柄第1星) ζ UMi 4.32
구진 제5성 (北第2星) GC1288 4.25
구진 제6성 (北第1星) GC31999 4.71
서양식 별자리에 따른 동정(同定)과 밝기는 위와 같다. 구진 제1성에서 제4성까지는 오늘날 작은곰자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데, 제1성인 구진대성이 북극성에 해당한다.
그런데 구진성이 처음부터 6개의 별로 인식된 것은 아니었다.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에서는, ‘천극성(天極星)이자 북진성(北辰星)인 태일성(太一星)의 뒤쪽에 있는 구부러진 4개의 별〔後句四星〕’로 묘사하였으며, 마지막에 있는 대성이 정비(正妃)이고 나머지는 후궁(後宮)들이라 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에는 아직 구진성이라 불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1성에서 제4성까지 4개의 별로만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적어도 전한(前漢) 말기 성제(成帝) 연간에는 이 별자리를 구진(鉤陳)이라 불렀던 것이 감천(甘泉) 태치(泰畤) 교사(郊祀)를 위해 양웅(揚雄)이 썼던 다음 감천부(甘泉賦)로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서(漢書)』「양웅열전(揚雄列傳)」에, ‘영령한 북진성을 중심으로 뭇 별들이 하늘에 펼쳐져 운행하였으며, 초요성을 불러 세상이 크게 태평하도록 돕게 하였고 구진성으로 하여금 병영을 담당케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진서(晋書)』「천문지(天文志)」에서는, 중궁(中宮)에 북극 5성 다음으로 중요한 별자리로 구진 6성을 배열하였다. 그러고는 ‘구진은 후궁(後宮)이자 천황대제(天皇大帝)의 정비(正妃)이며, 대제가 상주하는 거처이다. 구진 북쪽의 네 별은 여어궁(女御宮)이라 이름 하는데, 81명의 어처(御妻)를 상징한다’고 설명하였다. 『송사(宋史)』「천문지(天文志)」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구진 6성은 자미궁 가운데 있으며, 오제(五帝)의 후궁(後宮)이자 태제(太帝)의 정비(正妃)이며, 천제가 거처하는 제거(帝居)라고 정의하였다. 또 『무함(巫咸)』과 『형주점(荊州占)』을 인용하여, 천자를 보호하는 호위군(護衛軍)과 병권을 지휘하는 대사마(大司馬)를 담당하는 별자리라고 설명하였다.
『천문류초』를 비롯한 역대 천문지에서 설명하고 있는 구진 6성의 의미는 크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천제가 거처하는 궁궐인 제거(帝居)이고, 둘째, 천제의 정비(正妃)와 처첩(妻妾)으로 구성된 후궁(后宮) 별자리이며, 셋째, 천제의 호위군이거나 군진을 지휘하는 여섯 장군으로서 대사마에 해당하는 별자리이며, 넷째, 천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삼공(三公)과 삼사(三師)로 구성된 근신(近臣) 별자리로서 만물지모(萬物之母)의 역할을 한다.
구진 6성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원나라 때 천체를 관측한 결과, 천문의 중심인 북극성이 구진 6성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부터이다. 이것은 북극성 변동 문제와 관련이 있다. 지구는 자전과 동시에 타원궤도로 공전을 하는데, 그 회전력과 원심력에 의해 적도 부근이 부풀면서 북극 축이 조금씩 이동하는 세차운동을 하게 된다. 그 때문에 춘분점이 매년 50초씩 황도면에 대해 서쪽으로 이동하며, 그에 따라 북극점도 매년 조금씩 이동한다. 북극점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면 황도면의 중심축인 황극(黃極)을 원심으로 하는 원을 그리게 되는데, 북극점이 원운동을 계속하여 출발점으로 다시 복귀하는 기간인 세차(歲差) 주기는 2만 5,800년 정도가 된다.
이러한 세차운동에 따라 북극성도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된다. 북극점과 북극성은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북극점은 지구의 북극 축을 천구로 한없이 연장한 지점이고, 북극성은 수많은 별들 가운데 ‘북극점에서 가장 가깝고 밝게 관찰되는 별’로 지정된 별을 말한다. 북극성의 역사적 변천이라는 문제가 분명히 인식된 것은 4세기 동진(東晉)의 천문가 우희(虞喜)에 의해서이며, 이 사실을 반영하여 당나라 때는 기존의 북극성이던 제성(帝星)을 대신하여 천추성(天樞星)을 새로운 북극성으로 지정하였다. 천추성이 북극점에 가장 가까워진 시기는 당나라 헌종(憲宗)원화(元和) 2년인 807년 무렵이며, 이때의 거극도(去極度)는 0゚.54초였다. 이후로는 북극점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여, 당나라 개원(開元) 13년인 725년에는 거극도가 0゚.71, 송나라 황우(皇祐) 3년인 1052년에는 1゚.46, 송나라 원풍(元豊) 5년인 1082년에는 1゚.61에 이르렀다.
그 뒤 원나라 때는 천추성이 북극점에서 더욱 멀어졌는데, 그 대신 5.3등성인 천추성보다 훨씬 밝은 2.1등성의 구진대성이 북극점에 새롭게 근접하고 있음이 관측되었다. 원나라 최고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지원(至元) 18년인 1281년에 관측한 바에 따르면 천추성의 거극도는 2゚.67이었고, 구진대성은 4゚.0이었다. 그에 따라 구진대성이 새로운 북극성 후보로 부상하였다. 구진대성이 북극점에 가장 근접하는 시기는 서기 2102년으로, 이때 0゚.46까지 가까워졌다가 이후 다시 멀어진다. 이렇게 하여 조선시대와 오늘날의 천문학에서는 구진대성을 북극성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구진성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먼저, ‘밤에 유성(流星)이 등사성(謄蛇星) 쪽에서 나와 구진성(鉤陳星) 쪽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바리 같고 색이 붉으며 꼬리의 길이가 한 발쯤 되었다’는 기사에서는 구진성 근처에 유성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연산군일기』 9년 11월 16일). 이처럼 주로 유성이 출현했을 때 그 위치를 설명하는 용도로 구진성을 거론한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기록은 이후로 도합 27건이나 있다.
구진성이 후궁(後宮)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경우도 있다. 홍문관 부제학이집(李諿) 등은 상소문에서, ‘대저 인군(人君)은 스스로 남면(南面)하는 직분을 다하고 예법을 따라 거동하므로, 출궁(出宮)하면 성대한 대가(大駕)의 법식을 따르고, 어전에 앉으면 구진(鉤陳)과 우위(羽衛)의 위엄을 다합니다. 요즈음 조계(朝啓)가 의위(儀衛)를 베풀지 않고 일체를 간략히 하니, 공경하고 흠숭하는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성종실록』 21년 7월 16일). 이때 구진(鉤陳)은 후궁을 가리키고, 우위(羽衛)는 왕의 시위(侍衛)를 맡아보던 금위(禁衛)를 이른다. 요컨대 왕의 의위 법식과 절차가 너무 소략한 것을 비판하고, 아울러 후궁과 금위에 대한 위엄을 갖추기를 요청한 것이다.
구진성을 호위 군사인 금군(禁軍)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사간유태동(柳泰東)이 소장을 올려, ‘신은 듣건대 구진(鉤陳)의 호위를 시간을 엄수하여 순행하는 것은 한나라나 당나라 때의 상례(常例)입니다. 신이 금경(禁扃)에 대한 일을 갖추어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5경(五更) 이후 경졸(更卒)이 물러가고 난 다음에는 순검을 도는 탁성(柝聲)이 없으니, 숙위(宿衛)의 법제에 있어 소홀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소(四所)의 위장(衛將)·부장(部將)과 홍화(弘化)·동룡(銅龍)·금호(金虎) 등 문(門)의 입직(入直) 군사 약간 명으로 하여금 5경 이후로 각기 자기의 자내(字內)에서 교대로 순경(巡警)하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순졸(巡卒)만 힘들게 하는 폐단을 없애고, 궁금(宮禁)에는 허술히 하는 걱정을 없애소서. 삼가 바라건대 널리 순문(詢問)해 재처(裁處)하여 궁위(宮衛)를 엄숙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철종실록』 10년 8월 23일). 여기에서 구진은 호위와 숙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 『한서(漢書)』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삼국사기(三國史記)』
- 『천문류초(天文類抄)』
- 김일권, 『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즈윈, 2008.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사계절, 2008.